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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사화 이후 기묘인들이 주도한 정치적 제안들은 부정되었고 그들이 주도한 국가 정책의 시행 또한 거부되었다. 특히 양반과 비양반 그리고 중앙정부와 지방사회 간의 교류를 촉진하고, 더 나아가 국가의 사회 풍속을 개정하기 위해 기묘인들이 주도했던 ‘향약’은 그 시행의 결과와 관련하여 심각한 비판론에 직면하였으며 결국 그 실행은 좌초되었다. 그러나 기묘사화 이후 나타난 기묘인들의 정치에 대한 비판론을 단순히 적대적 두 집단 간에 벌어진 정치적 투쟁 과정의 부산물로 치부하거나 기묘인이 추구한 모든 정치에 대한 전면적 거부의 일면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실제로 기묘인들의 정치에 대한 비판론자들이 모두 기묘사화를 주도한 직접적 가화자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묘인의 정치철학과 이상에 동의하였던 이들 또한 사화 이후 종종 기묘인들의 정책에 대해 비판을 제기하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비판 중 대표적 하나가 ‘향약’에 관한 것으로, 소위 ‘사림’으로 분류되는 많은 중앙관료들마저 ‘향약’의 정치적 중요성에 대한 그들의 동의와는 별개로 기묘인들의 향약 시행 방식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특히 기묘인들이 향약의 효율성에 과도한 기대를 걸고 지나치게 성급히 시행하였다는 점은 그러한 비판의 주 대상이었다. 향약에 관해서는 이후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선조대에 이르러 결국 정부 주도의 제도화된 향약 시행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이 내려지게 되었다. 백성들의 반발을 우려한 조선의 지배 사족들이 강압적 규제가 일체 배재된, 지속적 가르침을 통한 점진적 ‘교화’ 방식을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 신민들의 도덕성과 행위 규범의 향상을 중시하였던 조선의 양반 사족들은 각각의 지역 사회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향촌 교화에 대한 노력을 지속하였다.


After the kimyo sahwa, many of the kimyo group’s political suggestions were rejected and the state’s policies reverted to their former state. Especially, the kimyo group’s way of implementation of hyangyak which presumably contributed to the facilitation of interactions between the state’s elite and non-elite, and the central government and local society, was criticized and rejected. However, even though it is true that after the kimyo sahwa, the critics of the kimyo group seriously reproached many of the group’s policies, it cannot be simply said that this criticism was merely a byproduct of the political struggle between two opposing political groups or that the critics totally rejected all of the kimyo group’s political vision. As a matter of fact, not all those who criticized the kimyo group’s political ways supported the purge of the group. Rather, among those who revealed their criticism of the kimyo group after the kimyo sahwa, there were many who agreed with and continued the group’s political vision. In other words, after the kimyo sahwa, a considerable number of central government officials, including those who have been categorized as sarim, pointed out that the kimyo group overemphasized the urgency in implementing hyangyak although they agreed with its significance in state politics. Finally, during the reign of King Sǒnjo, the central government refused to take responsibility of implementing hyangyak after political debates between the state officials. As a method for the state’s civilization, Chosǒn elite chose a long-term educational process instead of any forceful regulation, minimizing the risk of resistance from the people. However, due to their recognition of the importance of the moral and behavioral improvement of the people, the elite never stopped their efforts to educate the people in their localities in their own w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