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close

75년 고구려의 한성공격으로 인한 백제의 웅진천도는 6세기 한반도 남부를 둘러싼 정세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무령왕대에는 남방으로의 영역화를 가속화하여 513년에 기문을 장악한 후, 신라와 안라, 반파를 참가시키는 4국회의를 개최하며 백제의 영역임을 공식화하였다. 이어 백제는 늦어도 522년에는 대사지역까지 장악함으로써 대왜 교통로와 진주 및 함안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확보하였고, 531년에는 안라 주변까지 진출하여 걸탁성을 축조하였다. 이러한 백제의 움직임은 가라(반파)로 하여금 대신라 통혼전략을 추진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한편 신라와 통혼을 맺어 백제를 견제하려던 가라(반파)의 전략은 신라 역시 군사적 진출의도가 드러나면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신라는 3성 및 5성을 빼앗고 이어 금관국까지 멸망시키며 낙동강 이서로의 진출을 가시화하였다. 당시 가야제국의 일국이었던 안라의 당면과제는 백제와 신라의 군사적 압박이 가시화 된 상황에서 어떻게 자국을 보존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에 안라는 532년 백제, 신라, 왜국의 사신을 초빙하여 ‘안라국제회의’를 개최, 외교의 장에서 국제적, 공식적으로 자국의 안위를 보존하고자 하였다. 이 회의에 참가한 각국은 각자의 목적이 있었다. 백제는 장군 君尹貴 등을 파견함으로써 한반도 남부에 대한 군사적 진출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한편, 왜국의 이중적 외교자세에 대한 동향파악이 목적이었다. 왜국은 안라의 요청인 ‘和解相疑’의 중재자로서 참가하여 한반도 남부에서의 영향력을 높이는 한편 磐井의 난에 개입한 신라에 대한 의도 및 정세파악이 주 목적이었다. 신라는 안라의 장악방식을 둘러싼 방법모색에 있었기 때문에 외교를 담당하는 奈麻를 파견하여 안라에 대한 정보 및 백제와 왜국의 내부동향에 대한 정보파악이 목적이었다. 안라의 국제회의 개최는 안라국의 정치적 역량을 공식적․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After takin power of Gimun and Daesa, Baekje expanded it’s power to Anra, fortifying Geoltak-Seong in the first half of the 6th century. Since then, Geoltak-Seong had become a military strategic bridgehead for the invasion of Jinju·Haman as well as a inland way of negotiation with Japan. In reponds, Daegaya, the leader of Gaya empire, tried to make a political matrimonial alliance with Silla. Yet the alliance broke down because of Shilla’s military purpose toward Gaya. In 532, Shilla annexed Namgaya in order to visualize as a way of getting through the western part of Nakdonggang. At that time, an urgent task of Anra (a member of the Gaya Alliance) was to preserve the nation under the condition of military pressures from Baekje and Shilla. Therefore, Anra held the Anra Inter-Regional Conference, inviting Baekje, Shilla, and even Japan. The obvious reason for the conference was to guarantee the safety of the nation internationally and officially. Each participating nations had their own purpose. Baekje needed to both observe any reaction of neighboring nations and grasp the status of Japanese hypocrisy and double standards in foreign policy. Japan, as a mediator of a reconciliation among powerful nations increased it’s massive influence on sou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r. In addition, Japan tired to find out a purpose of Shilla why it intervened in the Uprising of Iwai in Kyushy. Shilla also needed to response the diplomatic way of Anra and observe the stance of Baekje and Jap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