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close

식민지 시대 제국주의 일본은 중국과 한국의 예술가들에게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와의 갈등’이라는 숙제를 안겨 주었다. 특히 일제가 파시즘을 강화하면서 민족말살 정책을 폈던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이러한 갈등은 극에 달하게 된다. 이러한 동아시아 현대사 속에서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와의 갈등, 전통과 서구적 근대 문물 사이의 갈등을 몸으로 직접 겪으면서, 그것을 몸의 예술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던 중국과 한국의 동시대적 예술인이 곧 매란방(梅蘭芳, 1894~1961)과 최승희(1911~1967)였고, 이들에게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이러한 동아시아 현대사의 격랑에서 조금 비켜 서있으면서 호남춤의 전통 속에서 ‘가장 조선적이 것이 가장 세계적’일 수 있는 가능성을 펼쳐 보인 예술인이 곧 호남춤의 명인 이매방(李梅芳, 1927~ )이었다. 중국의 매란방은 당시 불합리한 봉건적 혼인제도를 비판하기도 하고, 미신의 폐단과 무당의 사기극을 폭로하기도 하는 등 ‘구식 고립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경극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는 전통적인 세계관과 근대적인 세계관이 서로 충돌하던 시기로 매란방은 근대적인 세계관으로 비록 미래에 대한 전망은 제시하지 못하였지만, 사회의 문제점을 들추어내고 그것을 비판하고 그것의 개혁을 열망했는데, 이러한 점은 시대적 요청에 발맞추고 시대적 역할을 다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고대시가, 회화, 조각, 무술 및 각 행당의 연기예술의 정화로부터 새로운 舞蹈[무용동작]을 대량으로 만들어 냄으로써 경극의 연기예술 중에서 노래하며 춤추는 이른바 ‘載歌載舞’의 특징을 강화시켰다. 경극 발전의 역사에서 보면 매란방의 이러한 ‘古裝新戱’ 공연은 노래를 위주로 하던 기존 경극의 형식에서 탈피하여 무도[무용]을 위주로 하는 새로운 연극 형식을 창조한 것으로 새로운 미감을 만들어내어 경극의 연기세계를 더 풍부하고 다채롭게 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동시대 예술인인 조선의 최승희에게 있어서 193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무용이란 단순한 예술 활동이 아닌 조선적인 것에 대한 집착이었고,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저항적인 의미를 담고자 하는 의도적 산물이었다. 그 시절 그녀가 무대에 올린 작품이 유독 ‘조선의 산물’이나 ‘학대받는 사람’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담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제는 파시즘을 강화하기 시작한 1930년대 중반부터 최승희가 동양인임을 강조하고 그녀에게 서구 초극의 욕망을 투사하며 서구를 대상으로 힘의 관계를 역전시키려 하였다. 그 이념적 거점이 동아시아 이데올로기였으며, 기만적인 내선일체론이 그 논리적 장치로 동원되었음은 물론이다. 서구와의 대결의식이 개입된 이 중층적 관계망 속에서 무희 최승희의 자기표현은 식민지 조선민족의 자기표현인 동시에 동양주의에 입각한 일본인의 자기표현으로도 활용되었던 것이다. 호남춤의 명인 이매방(李梅芳, 1927~ )은 매란방과 최승희보다 한 세대 뒤이기 때문에, 동아시아 현대사 속에서 매란방과 최승희가 몸으로 직접 겪었던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와의 갈등, 전통과 서구적 근대 문물 사이의 갈등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1939년 그의 나이 12세에 북경에 있었던 큰 누나의 연결로 당대 최고의 경극 배우 매란방과 조우하게 되었고, 또 매란방의 공연을 접하고 이국적인 향취에 매료되어 그의 제자에게 장검무 등을 배우는 등 매란방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춤의 뿌리는 호남의 전통춤에 착근되어 있다. 이매방은 어린 시절 자주 공연을 보았던 최승희의 신무용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최승희의 춤은 특이한 기교가 있고, 서구적인 몸매에서 나오는 관중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고 인정하면서도, 일본이 최승희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기본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최승희의 춤은 한국춤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최승희의 16년 후배인 이매방은 최승희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겠지만, 이러한 최승희의 ‘조선춤’에 대해서 “최승희가 춤을 잘 추고 또 체격도 예쁘고 인물도 예쁘고 좋은데 춤은 잘 추는데 순수한 한국 춤이 아니야.”라고 평가하면서 그녀의 한계를 호남춤의 정서로 극복하려 하였던 것이다. 과거 우리 전통춤의 담당주체는 광대, 창우, 기생 등으로 민간예인들이었다. 그중에서 무계와 권번 계통의 춤을 정통으로 친다. 무계의 혈통을 타고나 전라도 일대의 권번을 두루 거쳐 호남춤의 다양한 갈래를 습득한 이매방은 이를 융합, 통합하여 호남류 전통춤을 독특한 미학으로 정식화한다. 이것이 곧 최승희류의 동양주의적 세계성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호남춤의 세계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Mei Lanfang (simplified Chinese:梅兰芳; traditional Chinese:梅蘭芳; pinyin:Méi Lánfāng) (October 22, 1894~August 8, 1961) was one of the most famous Peking opera artists in modern history, exclusively known for his qingyi roles, a type of dan role. Méi Lánfāng is his stage name, and in Chinese it is generally considered a feminine name. His real name was Méi Lán (Chinese:梅瀾). In his 50-year stage career, he maintained strong continuity while always working on new techniques. His most famous roles were those of female characters; skillful portrayal of women won him international acclaim, and his smooth, perfectly timed, poised style has come to be known in opera circles as the “Méi School.” He also played an important part in continuing the performance tradition of Kūnqǔ, noted particularly for his interpretations of Dù Lìniáng (杜麗娘; in The Peony Pavilion) and Bái Sùzhēn (白素貞; in Leifeng Pagoda) and Beauty Yu (in Farewell My Concubine). Mei’s famous portrayal of Beauty Yu was so historically moving that Wenting Song say he is one of the greatest vocal artists in modern China. In July 1937, the Marco Polo Bridge Incident occurred. The Imperial Japanese Army soon occupied Beijing. The commander of the Japanese Army ordered Mei to perform for them and appointed Mei to a high rank official position. But Mei refused to sing throughout the duration of the war and endured an impoverished lifestyle until the war ended in 1945. During the colonial period, the literary society of Chosun was mainly interested in discovering the ‘mind of Chosun’. Choi Seung-hee also tried to find it in the living culture of the native and common people. She developed the Korean traditional dancing as a performing art and established it firmly as a traditional art. Also, for the globalization of the native qualities, she moved around and performed in America, Europe, South America, etc. From the late 30’s, Japan enforced the policy of NE_Sun_Il-Che(Korea and Japan are one body) and tried to eliminate the sprit of Chosun. Choi Seung-hee comprised her art with orientalism supported by Japan during this era, but she actually treated Chosun, Japan, and China equally and found the oriental characteristic by examining the traditional dancing of each country. After all, cultural colonialism of the imperialistic Japan drove the ‘Choi Seung-hee Boom’ in the pre-modern Japan. On the other hand, it showed the ambivalence of the intellectuals who dreamt of irreverence under the colonial ruling. Amidst the abnormal and uninstitutional cultural floating of the colonial era, her dancing had multi-level meanings. Lee Mae-bang was born in Mokpo in 1927 and he liked to dance since childhood. He began to learn to dance Seungmu, Bubgo, Gummu and has been pushing on the Korean traditional dancing for almost 80 years. The distinctive feature of Lee Mae-bang dance shown in his lifelong dance and his main 12 works is the combination of static and dynamic movement in ita highest reach of naturalness. There are very delicate foot treads specific in Honam(Southeastern Region) in his dance and these are extremely womanly dance performed by man. His personal performance are invariably on his main works inherited and succeeded as the quintessence of Honam(Southeastern Region) traditional dance. Especially, the Seungmu and the Salpuri dance which are the best in his dances has succeeded to the tradition of Honam dance. There is the natural beauty of Honam Gibang art in his dance. The dance of Lee Mae-bang succeed to genealogy of Honam dance is enough to call excellent culture properties of peop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