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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리인 제천의 만지곡에서 출생한 임호 박수검은 17세기 중후반을 전후로 한 관료이면서 사상가였다. 고려 왕족의 후손인 박수검은 효성과 학문을 중시한 전래의 가풍 속에서, 일찍부터 독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수학기 동안에 박수검은 순차적으로 조석윤‧이영선‧이준남‧송시열 등의 문하에서 학업을 연마하는 행운을 누렸고, 자연히 임호는 원근을 막론하고 조기에 문명을 떨칠 정도의 실력을 배양하게 되었다. 그런데 박수검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과거 공부에 착수하였으나, 실제 그가 문과 급제한 나이는 뒤늦은 44세 때였다. 이후 박수검은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치는 사환기에 접어들게 되었으나, 남인과 뚜렷한 대립각을 곤두세웠던 그의 서인 노론적 당색으로 인해 잦은 환로의 부침을 경험하기에 이른다. 특히 박수검은 기사환국 직후에 고향 제천으로 낙향, 몇 년간에 걸쳐서 이른바 의림경영에 돌입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박수검은 경학과 역사학, 역학과 장자철학 등을 아우르는 일련의 저술을 추진해 나감으로써, 학자 본연의 자세를 망각하지 않았다. 박수검이 남긴 저서 목록인 『진사통고』‧『중용석의』‧『장자소요제물론이편주해』‧『참동계교정』‧『절위여편』과 문집인 『산일여편』 등은 관직 생활을 하는 와중에서 저술된 결실로서, 임호의 치열한 학자적 탐구 노력을 반증해 준다. 특히 박수검은 一理 혹은 理原을 철학적 화두로 설정한 가운데, 자신의 전 저서들 속에 이 물음을 투영시켜 두었음이 주목된다. 이같은 정황은 박수검의 사상적 착지점이 근본 정주학자였다는 사실을 뚜렷이 확인시켜 주고 있다.


Park Soo-geom was born in a country village, Jecheon (堤川). He was the posterity of Goryeo royal family and experienced the invasion of Ching (丙子胡亂) in person. Park Soo-geom studied until the age of 40 under the scholars who succeed the tradition of Giho school neo-Confucianism (畿湖性理學) such as Jo Seok-yoon (趙錫尹), Yi Yeong-seon (李榮先) and Song Si-yeol (宋時烈). Accordingly, the academic school and political position of Park Soo-geom were defined as Seoin (西人) Norongye (老論系). Park Soo-geom passed examination for government officer (科擧) when he was 44 years old; however, his career as a government officer was not successful. He had frequent conflicts with Namin (南人) and he ended up resigning government position and returned to home village. Meanwhile, Park Soo-geom authored Jinsatonggo (震史通考), Jungyongseokeui (中庸釋義), Chamdonggyegyojeong (參同契矯正) and Jeolweeyeopyeon (絶韋餘編). He also published annotation (註解書) on Zhuangzi (莊子). Like this, the academic world of Park Soo-geom was quite extensive accommodating historical studies, jingxue (經學), yixue (易學) and Zhuangzi (莊子) philosophy. These books share the characteristic of exploring the topic of chengzhuxue (程朱學) represented by yili (一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