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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식민지 조선이 대한민국이라는 근대국가로 정초되던 시기에 이루어진 근대국가와 근대학문의 관계, 제도 아카데미즘과 『사상계』의 관계를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에 따라 본고에서는 『사상계』가 사상 정립이라는 목표 수행을 위해 인문학을 주요 학문으로 호출하였으나 시대적 요청에 따라 사회과학으로 초점을 이동하게 되었음을 밝혔다. 또한 이러한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 학술적 글쓰기 관행을 정착시키는 등 아카데미즘의 정련화를 그 하위 과제로 삼게 되었음을 집중적으로 고찰하였다. 『사상계』가 이처럼 학술지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신생 대한민국이 처한 특수한 국면에서 비롯된다. 국가 건설기의 지식인들은 식민지 시기와는 전혀 다른 사회·정치적 조건에 처하게 되었으며 그런 만큼 지식과 사상의 지반 또한 갱신되어야 했고 그 원천과 목록은 처음부터 다시 탐사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학술 공동체와 학술 생산 시스템이 구축․가동되기까지 이 역할을 담당했던 대표적인 매체가 『사상계』이다. 즉 이 시기에는 제도 아카데미즘에서 간행되는 학술지와 대중매체인 『사상계』의 학술적 성격이 거의 구별되지 않았으며, 이것은 당대에 학문이 아카데미즘의 고유한 영역이 아니라 아카데미즘과 근대 매체가 함께 다루는 공동 영역으로 상상되고 인식되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렇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지식을 분류하여 특정 분야의 학문을 학적 거점으로 삼으면서 학문의 위계화를 도모하는 것은 『사상계』가 독점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학문을 배치하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사화과학 중에서 정치학과 경제학이 『사상계』에서 가장 중요한 학문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이 학문들이 지적 구심점에 놓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현실을 해명하고 그에 개입할 수 있는 지적 무기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상계』에서 아카데미즘의 형식과 내용을 담은 풍부한 논문 샘플들을 제공함으로써 학자들을 훈련시키고자 한 점이 주목된다. 그리고 『사상계』 초기에 이 학자 훈련은 곧 독자 훈련에 다름 아니었다. 학술지의 성격이 가장 강했던 1954년도까지 『사상계』의 독자는 학자가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상계』는 1955년도에 들어와 대학생과 30대 지성인으로 중심 독자를 변경한다. 이것은 독자의 폭을 확장해서 지를 대중화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상계』에서는 학술적 글쓰기의 형식을 익혀야 쓸 수 있는 논문을 대학생 대상으로 공모하거나 좋은 논문이라고 판단된 경우 대학생의 글이라도 과감히 지면을 할애해 줌으로써 학술적 글쓰기를 대학생이 써야 할 글로 지정하고, 장려하였다. 하지만 『사상계』가 독자의 폭을 넓히면서 점차 학술지의 성격보다는 대중적인 교양지와 시사정론지의 성격이 강화되며, 이는 독자 대중들의 지속적인 요구와 상관이 있다.


The purpose of his paper is to consider the relation of a modern state and modern academy, especially Sasanggye and academism. To do this work, I tried to make it clear that Sasanggye designated litterae humaniores to achieve the goal of idea formulation at first, but gradually its focus moved to social science because of the response to the request of the times. And I investigated that Sasanggye had intensively refined academism to settle down the academic writing tradition as its subordinated subject. It means Sasanggye took the role of a learned journal. At that time, as South Korea was a newly emerging nation, intellectuals tried to have new knowledges for nation-building. And the academic community and knowledge production systems had not constructed yet, Sasanggye took the charge of that role. So learned journals which were published by the learned societies and Sasanggye were not distinguished easily in the 1950s. But Sasanggye had a exclusive possession in classifying knowledges with particular methods. In other words it adopted a particular branch of learning as a foothold and attempt to hierarchize the academy. And through the process of its arranging learning, economics and historical science were embossed as the important knowledges in Sasanggye. The reason why they took the important role was to have power to explain the actualities concretely. However, Sasanggye is also noticeable in the respect of training the scholars by presenting abundant paper samples. And in the primary stage of Sasanggye, this scholar training was none other than reader training, Until 1954 its readers were scholars mostly. But in 1955 Sasanggye changed the main reader with university students and thirties intellectuals. This was for popularization of the academic knowledge. For This purpose, Sasanggye invited the public to join in the prize contest for the papers on university students which they could participate in after learning how to write academic papers. And Sasanggye boldly devoted space to the papers written by university students if they were remarkable. But as Sasanggye extended the range of the reader, the characteristic of a popular culture magazine for the well-educated classes was strengthen gradually. Undoubtedly it had relations with the continuously demand by the rea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