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close

독일 소설들을 읽다보면 이야기의 한 가운데 주옥 같은 서정시들이 들어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에서 빌헬름이 듣게 되는 노인의 노래와 미뇽의 노래, 그리고 켈러의 소설, 『푸른 하인리히』에서 하인리히가 감옥담장 너머로 듣게 되는 소녀의 노래가 바로 그런 경우들이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칼 필립 모리츠의 소설 『안톤 라이저(1785-1790)』에서 안톤 라이저가 자작한 시 텍스트들이 유년의 이미지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 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본 연구에서는 일반적으로 시 분석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시의 해석이나 이미지 분석에 주안점을 두기 보다는 소설의 주인공, 즉 안톤의 성장 발달 과정에서 시적 텍스트들이 어떠한 역할을 하며 또 그것이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한 안톤의 삶 전반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왜냐하면 그가 어린 시절부터 줄곧 써 온 시들은 1부에서 4부에 이르기까지 형식뿐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변화를 보이는데, 그 안에서 우리는 안톤의 심신의 변화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본 논문에서는 안톤이 유년 시절부터 불우한 가정 환경, 부모의 무관심, 종교적 훈육으로 인한 억압, 가난으로 인한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은 수모와 무시 등을 이겨내고 가까스로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발견해나가며 어엿한 성인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게 한 원동력이 결국 그가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 해 온 책 읽기 - 성서나 찬송가 등 -와 시쓰기에 있다 본다. 뿐만 아니라 유년 시절이 주로 묘사되는 소설의 제 1부에서 그는 책을 읽는 순간 모든 것을 잊고 그가 처한 현실과는 다른 ‘세계’로 몰입할 수 있었고 시를 쓰는 순간, ‘삶의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는 시 쓰기의 즐거움을 시를 쓰기 이전에 자신의 유년을 되돌아본다거나 시세계로 몰입하면서 기술되고 있는데 이러한 풍경은 주로 소설의 제 2부와 3부에서 묘사되고 있다. 결국 그가 쓴 시 텍스트들에서의 유년의 이미지들은 고달프고 냉혹했던 현실과는 달리 자기 성찰과 자기 반성이라는 여과 장치를 통해 긍정적 모습을 보인다. 이런 과정에서 안톤은 자신이 받아 온 유년 시절의 갖은 수모와 굴욕적인 삶을 결국 시적 글쓰기, 즉 시 습작이라는 창작활동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것은 그가 소설의 제 1부에서는 성서읽기의 재미에서 시작하여 제 2부와 3부에서는 본격적인 시 쓰기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또한 안톤은 자신이 쓴 시들을 주변 인물들 - 친구 필립과 교장 선생님, 그리고 목사님 등 - 에게 낭독함으로써 자아 실현과 자기 성취라는 느낌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시쓰기와 시읽기를 통해 그는 유년의 부정적인 이미지들을 현재의 긍정적인 이미지로 그려놓을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활력 또한 부여받게 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일연의 과정들이 안톤에게는 성장발달의 동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과대망상, 열등감, 우울과 자기 연민 등 부정적인 기억들과 이미지로 점철된 “유년의 기억들 Frühkindheitliche Erinnerungen”을 스스로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창의적인 글쓰기를 통한 유년의 재경험 reparenting은 안톤에게는 유년의 극복은 물론 그 시대를 초탈하는 새로운 삶의 출구를 되찾아줄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그가 소설 중간 중간에 쓴 시적 텍스트들이 주요 기능을 담당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시적 텍스트들은 그의 과거의 기억들과 이미지들을 대변하는 내면의 소리이자 창의적인 인간으로서의 자아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 텍스트들을 통해 서술되는 안톤의 형상들은 이제 아이가 아닌 어엿한 청년으로 가는 성장의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이것은 또한 그가 소설의 제 1부나 2부에서 보여주었던 시 텍스트들이 주로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나 환심을 사기 위해 시작된 - 당시의 즉흥시 Gelegenheitsgedicht - 것이라면 소설의 후반부에서 제시된 그의 시 텍스트들은 매우 서정적인 면모뿐만 아니라 자타가 공인하는 자유시리듬의 형식 Freier Rhythmus들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을 통해 그는 당대의 젊은 시인들처럼 자신의 느낌을 직접적이고도 얽매임이 없이 표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 또한 안톤의 시 텍스트들이 보여주는 발전적 모습이자 시대극복의 한 양상이라 하겠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은 안톤이라는 한 인간의 변화이자 동시에 당시 독일문학에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예고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