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close

성종시대의 교화문제는 조선왕조의 창업이후 태종과 세조를 거치면서 형성된 주도적인 정치세력에 대한 도덕적인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세조시대의 훈신들의 국정전횡과 풍속의 퇴락으로 인해 교화논쟁은 그 이전의 교화를 둘러싼 논의보다 훨씬 더 깊이 정치가의 내면의 문제로 파고들었고, 小人에 관한 논쟁을 통해서君主․大臣․臺諫 사이에서 치열한 대립과 논쟁을 야기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풍의교화를 둘러싼 논쟁은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과 중종시대를 걸치면서 士禍라는극단적인 정치투쟁과 비극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본 논문은 士禍나 黨爭의 시대와 비교해볼 때 ‘교화’라는 동일한 시대적 과제를안고 있었던 성종시대가 다른 어느 시대에 비해서 太平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무엇인가 하는 점에 주목하고, 대신과 대간의 대립을 ‘중재’하며 정치적 안정을 유지했던 성종의 ‘설득적 리더십’을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비록 정치적 안정을 해칠 수 있는 소인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때로는 질책하거나 징계하고 때로는 改悛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대신과 대간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군주의역할이 존재한다면 태평의 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을 보이고자 한다.


The issue of reclamation(敎化) in the era of Seongjong was raised to morally criticize the ruling political elites who had wielded powers since King Taejong and Sejo's reign. Especially the issue went into more in-depth analysis of the politician's minds, and caused debates on the petty man(小人)among Seongjong, the censors(臺諫) and the ministers(大臣). This kinds of controversies often resulted in the extreme political struggle and tragedy as we could see in the literati purges(士禍) since the era of prince Yeonsan(燕山君) and the Jungjong(中宗). This paper raises the question why Seongjong's reign could keep political peace and stability more than any other times though it also had the same issue of reclamation. This paper tries to solve this question focusing on Seongjong's persuasive leadership, which mediates political confrontation between the censors and the ministers. Throughout this analysis, it will be clear that if the prince can play the role of mediating the conflict, by reprimanding sometime and by providing the opportunity of self-reflection other time, the political stability can be maintained in spite of the existence of the petty 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