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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후기 진주지방 교방에서 추어진 정재의 연희양상을 『교방가요(敎坊歌謠)』를 통해 살피는데 목적을 두고, 『교방가요』와 정재홀기에 제시된 정재와 무도 내용을 통합적으로 검토하였다. 진주지방의 목사를 지낸 박원(璞園) 정현석(鄭顯奭)이 풍습을 바로잡으려고 진주 교방에서 익히는 가무(歌舞)를 바로 가르치고자 1872년(고종 9년) 2월에 『교방가요(敎坊歌謠)』를 만들었다. 정현석이 진주 지방 교방에서 가르친 정재 종목을 『악학궤범』에 수록된 것으로 제시하였는데, 이것은 교방 정재의 정통성에 힘을 실어주려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악학궤범』에는 <검무>, <선유락>, 항장무 등이 기록되지 않았고, <육화대>는 조선후기의 <가인전목단>의 내용으로 추었고, <헌반도>는 무원 8인으로 구성하여 궁중 정재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진행되었다. 진주 지방 교방에서 연희된 종목은 당악과 향악 그리고 제례와 민속춤 등이 함께 상연하는 등 공연 종목이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다양하게 구성되었고, 교방의 정재 또한 궁중정재의 내용을 근간으로 한 것은 사실이나 실제 공연된 내용은 차이가 있었다. 『교방가요』에 기록된 내용으로 볼 때는 『악학궤범』의 정재를 근간으로 하여 진주 교방에서도 궁중과 같은 의례에 따라 진행한 듯 보이나 실제 공연된 내용에는 궁중 의례가 적용되지 않았다. 궁중에서는 왕을 중심으로 연희가 진행되지만 교방에서는 예를 갖추어야 할 대상에 따라 무구의 수도 조정된 것을 알 수 있다. 당악정재와 향악정재의 규범이 진주 교방에서는 적용되지 않았고, 무원 구성 및 역할 구분의 엄격함이 적용되지 않았다. 정재의 명칭을 궁중정재와는 다르게 사용하였고, 춤을 마친 다음 여흥의 춤이 또 행하는 등 궁중보다는 자유스러운 형식을 갖추어 진행하였다. 결론적으로 진주 지방의 교방 정재는 궁중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은 사실이다. 정재의 종목을 그대로 차용하였고, 비록 형식적이지만 궁중 예법을 차용하려한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정현석이 민심을 바로잡고자 『악학궤범』의 내용을 제시하였으나 실제 연희된 내용은 진주 교방에 맞는 내용으로 적절히 변용되어 새로운 양식으로 표출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진주 교방에서의 정재는 다분히 유희적이고 기예적이며 유흥적인 성격을 포함한 공연으로 행해진 것을 알 수 있다.


This research is to examine court dances known as chŏngjae 呈才, especially performed at the Chinju Kyobang 晉州敎坊 (Chinju Institute for Female Entertainers) on the basis of such literary sources as Kyobang kayo『敎坊歌謠』 and Chŏngjae mudo holgi 『呈才舞圖笏記』. Chŏng Hyŏn-sŏk 鄭顯奭, a magistrate in Chinju County, complied Kyobang kayo in Feb., 1872 (the 9th year of King Kojong 高宗) to teach the right music and dancing at the Chinju Kyobang. The fact that he referred to Akhak kwebŏm『樂學軌範』(Guide to the Study of Music)(1493) for this suggests that he wanted to establish its legitimacy. However, Kŏmmu 劍舞 (Sword Dance), Sŏnyurak 船遊樂 (Joyment of Boat Dance), and Hangjangmu 項莊舞 (Dance of General Hsiang Yü) are not found in Akhak kwebŏm. Yukhwadae 六花隊 (Six Flowers Dance) was performed in the manner of Kainjŏn miktan 佳人剪牧丹 (Beautiful Women Picking Peonies). There were 8 dancers in Hŏnbando 獻盤桃 (Offering of Table Dance), which is quite different from court dance (chŏngjae). The music and dance performed at the Chinju Kyobang were quite diverse ranging across tangak, hyangak, folk music, and religious ceremonies. Chŏngjae was performed differently there from the original court dance (chŏngjae), as well. Judging from Kyobang kayo, chŏngjae performed at the Chinju Kyobang followed the one shown in Akhak kwebŏm and was supposed to be performed in accordance with court ceremony, which wasn't applied actually, though. Court dance (chŏngjae) was performed with the king at its center, while at the Chinju Kyobang the number of musical instruments was different depending on the person for whom the ceremony was performed. The standard of tangak and hyangak was not applied to chŏngjae performed at the Chinju Kyobang. The lineup and the role division for dancers were not very strict. Different name was used from that of court dance (chŏngjae). There was extra dancing to retain the excitement after the performance. Therefore, chŏngjae performed at the Chinju Kyobang seems to be freer in its form than that of court dance (chŏngjae). Chŏngjae performed at the Chinju Kyobang was influenced by court dance (chŏngjae) and adopted its music and religious ceremonies. Although Chŏng Hyŏn-sŏk, the magistrate, went to as much length as to rely on Akhak kwebŏm to rectify the custom of the region, it was transformed into a new style to meet the needs of Chinju Kyobang, which is more amusing, sophisticated, and entertain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