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close

적어도 자신의 주저인 『주체 이론』과 『존재와 사건』에서 바디우의 주체는 저항과 일탈의 주체로부터 믿음의 주체로 전이한다. 배치공간(splace)과 탈배치(outplace)로 창출되는 ‘둘’(the Two)의 모순적 역동성은 저항이 질서와 체제에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둘’의 모순적 역동성이 전체 구조의 운동성을 창출하고, 이러한 운동성이 질서와 체제의 토대임을 『주체 이론』은 논구한다. 그 ‘둘’의 구조가 바로 주체이다. 저항의 주체는 클리나멘의 일탈 운동으로서, 사라지는 항의 매개적 기능으로서, 그리고 파괴와 재구성의 역동적 운동으로서 다양한 모습을 드러낸다. 『존재와 사건』에서 이제 주체는 공백으로서의 존재로부터 ‘사건’ 이후 개입과 충실성의 연산을 통해 진리를 노출하는 주체로 전향한다. 보편적 혹은 유적인 진리를 주체가 처한 국소적 상황 속에서 충실성의 탐문 절차를 통해 논구해 나가는 투사적 학인(a militant savant)이 주체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사건(들) 사이를 개입과 충실성의 연산으로 매개하는 사라지는 항이다. 대화(dialogue)란 선언과 사라짐의 반복적 운동 아닐까? 모든 대화는 욕망의 독백(mono-logue of desire)임을 기억할 때, 타자를 향한 소통의 몸짓은 결국 내가 믿는 진리 사건의 믿음을 일관성 있게 논구하고, 그리고 다음 주체 계기들에게 그의 승계를 위한 선택과 결단을 맡기는 행위 아닐까? 적어도 진리의 종교들 사이의 대화는 이 사건의 불연속성을 매개로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라는 예감을 본고는 논구한다.


At least in two of his major trilogy, The Theory of the Subject and Being and Event, A. Badiou seems to transit from the subject of resistance and deviation to the subject of faith. First in The Theory of the Subject, he argues that the dynamical contradiction of the Two generated between the splace and the outplace is not secondary to the established order, but rather the foundation or ground of the order, for it produces the movement of the whole structure. This structure of the Two is none other than the subject. The subject of resistance shows itself with its various appearance such as the deviational movement of clinamen, the mediative function of the vanishing term and the dynamical movement of destruction and recomposition. Now in Being and Event, the subject is transited to that which uncovers the truth through interventional interpretation and faithful generic procedures out of the being of the void. Then, the subject becomes a militant savant arguing the generic truth by means of enquiries of fidelity in its local situation. Nevertheless, the subject is not a being. it is just a vanishing term mediating the event(s) by its intervention and the operation of fidelity. Can we say that dia-logue is no more than this faithful declaration of the truth and its vanishing? Given that all dialogue is nothing but the reflection of the mono-logue of desire, doesn’t it seem to be more honest and true that our communicative action towards the other(s) is not different from the action, which argues ‘my’ subjective belief in the event of the truth and then lets the other successive subjective moments choose and decide for its acceptance? The anticipation this paper feels is that any religious dialogue between religions of truth has at least to take place with the medium of this discreteness of the event of truth, with humble acknowledgment of self-limit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