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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국왕의 혼례절차인 ‘命使奉迎’은 국왕의 체모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국왕이 구차스럽게 몸소 私家로 나아가서 신부인 왕비를 맞이해 오는 대신 使者로 하여금 대신 궁궐로 모셔오게 한 것이다. 16세기 중종대에 오면 『주자가례』에 따라 국왕의 혼례절차가 친영제로 바뀌게 되지만 이 때의 친영도 국왕이 직접 왕비집으로 가서 왕비를 맞아오는 것이 아니라, 왕실과 왕비집의 중간지점에 관소를 설치하여 국왕이 그곳에 가서 신부를 맞아오는 절충적인 방법인 ‘假館親迎’이었다. 가관친영례에 의한 국왕의 혼인은 중종대에 한차례, 선조대에 두차례 모두 세차례 시행되었다. 이후 17세기 인조대에 이르러서는 관소인 태평관을 거치지 않고 왕이 직접 별궁으로 가서 신부를 맞이해 오는 ‘別宮親迎’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때의 변화는 병자호란 후 재정상의 어려움 때문에 혼례절차를 간소화한다는 외양을 띠었지만, 왕과 신하의 예는 같다는(君士夫同一禮) 의식이 상대적으로 강한 서인의 정권 장악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인다. 그러나 초월적인 왕의 권위를 어느 정도 살려주던 가관친영의 폐지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가관친영에서 별궁친영으로 바꾸는데 대한 거부감을 해소하는 데에는 별궁이 큰 역할을 하였다고 보인다. 즉 궁궐의 하나인 별궁에서 신부를 맞아오게 함으로써 별궁을 태평관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장소로 받아들이게 했기 때문이다. 별궁은 그 기원을 연산군 12년으로 잡을 수 있고, 국왕의 혼인에 별궁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실제 운영된 것은 선조 35년이 처음이라 할 수 있다. 별궁은 한편으로는 왕실가족으로 선택된 왕비나 세자빈의 높아진 지위를 유지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왕실의 혼례라는 성대한 의식을 순조롭게 진행하여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운영되었다. 별궁의 운영은 왕비로 하여금 왕실가족으로서의 지위를 견지할 수 있게 하였을 뿐 아니라, 왕이 사가로 왕비를 직접 맞으러 갔을 때 일어날 수 있는 국왕체모의 손상을 막을 수 있고 동시에 친영 본래의 의미를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방안으로 기능하였다. 인조 16년 이후, 별궁제의 정착과 함께 간택된 왕비를 임시로 그곳에 거주하게 하여 의제적 왕비집으로 삼게 되었으나, 별궁은 왕비집으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없는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당시 위정자들이 택한 방법은 왕비의 본가를 잠정적으로 별궁 가까이로 옮겨 별궁과 이전된 왕비집 두 곳에서 혼례절차를 진행토록 하는 것이었다. 왕비 본가를 별궁과 가깝고 규모가 큰 집으로 옮김에 따라 혼례절차의 원활한 수행 및 점차 성대해지는 왕실혼례의 구색을 맞추기에 적합하게 되었다. 조선중기 이후 국왕의 혼인은 관소를 이용하지 않음으로써 사서인과 동례인 진친영에 접근하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별궁을 의제적 왕비집으로 하여 진친영의 외관을 과시하려고 하였으면서도, 별궁의 공적 역할을 부각시킴으로써 끝내 국왕 혼례의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결국 별궁친영은 국왕혼례의 독자성과 진친영의 이행이라는 양면성을 모두 갖춘 기묘한 타협책으로 마련된 것으로, 이렇게 탄생된 별궁친영은 이후 대한제국기까지 확고히 정착되어 『주자가례』의 혼례에 따라 국왕의 혼례를 치르려는 노력을 최대한 반영한, 조선왕조 특유의 최종적인 귀결책이 되었다.


It was for the purpose of keeping the king's authority that MyeongSa-BongYeong(命使奉迎) was adopted in the early Choseon period. Namely, instead of receiving the queen in person, the king required that the queen be guided to the palace by his messenger for the marriage ceremony. Gaguan-Chinyeong(假館親迎), implemented under the reign of Joongjong(中宗) in the 16th century, was changed from the previous ceremony procedure in accordance with Juja-Garye(朱子家禮). However, it wasn't the same way of having the king receive the queen from queen's house personally; it was only a compromise in which the king receive the queen in a middle place, Tai-Pyoung Guan(太平館), between the court and the queen's house. After Joongjong's reign, Gaguan-Chinyeong was performed twice in the SeonJo(宣祖) Dynasty. However, at the time of the Injo(仁祖) dynasty, the form of the king's marriage ceremony was changed into BeolGung-Chinyeong(別宮親迎), in which the king received the queen from Beol-Gung(別宮) in person. On the surface this change was presented as a result of the difficulty of finance after the war of ByungJa-HoRan(丙子胡亂); however in reality it was deeply connected with the appearance of the SeoIn(西人) party who believe that propriety is the same between the sovereign and his subjects, namely “GunSabu-Dongilrye"(君士夫同一禮). However the Gaguan-Chinyeong, which maintained the transcendental king's authority, was not abandoned easily. It appears that Beol-Gung played an influential role in diminishing the reaction to the changing practice of Gaguan-Chinyeong to BeolGung-Chinyeong. As Tai-Pyoung Guan was devastated by the war at that exact time, the adoption of the policy of receiving bride from Byeol-Gung was implemented on a more simple and less extravagant scale. The origin of Byeol-Gung expected the bride of the crown prince to live apart from her native family. Its purpose was to strengthen the authority of the bride who will be a member of the royal family. Afterwards, choosing one of the palaces to be used for Byeol-Gung became a habitual practice. And then, Byeol-Gung was utilized as the place where the bride of the king or crown prince trained to become a member of the royal family. Therefore Byeol-Gung had two faces of meaning: one was public space which was one of the palaces, and the other was private space where the selected bride of the king or crown prince was living. Finally, Byeol-Gung not only made the queen keeping the authority of royal family, but also made the best use of the point of Chinyeong by receiving the queen at the place where she is living. And what is more, Byeol-Gung enabled the king to reduce the loss of his authority which was caused by visiting private house in order to receive the queen. It was because Byeol-Gung where king received his bride, the queen, was not a private house but one of the palace. After middle Choseon period, the propriety of king's marriage got near to his subject's propriety, by rejecting Gaguan-Chinyeong. But the peculiarity of king's marriage was maintained by emerging public role of Byeol-Gung. After all, Byeol-Gung was prepared for the compromising plan of two faces; one was reflection of peculiarity of king's marriage ceremony, and the other was transitional stage for performing Gin-Chinyeong(眞親迎) which was mentioned in Juja-Garye. From this time to Teahan Empire era, BeolGung-Chinyeong was la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