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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위덕왕이 왕흥사를 창건하게 된 목적과 시기, 그리고 기능과 위상면에서의 변천과정을 사비시대 백제 왕권의 추이와 관련하여 살피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왕흥사는 최근까지의 고고학적인 성과와 일본의 법흥사의 창건 사례를 원용해 볼 때 그 목탑의 조성 시기인 577년 전후의 시기에 창건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왕흥사는 위덕왕의 발원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부여 능사와 함께 성왕이나 왕자의 추복을 위한 왕실의 원찰이었다. 위덕왕은 왕흥사 목탑 창건을 계기로 하여 왕족의 결속과 왕권의 기반을 강화시켜 나가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 방법으로 모색된 것이 사리봉안의식이었으며 이를 통해 왕권의 위상을 높이고 아울러 불교이념을 적극 수용하여 왕권의 기반을 재확립하려는 전기로 삼으려 하였다. 법왕대에는 위덕왕대 창건된 이래 완성을 보지 못했던 왕흥사에 대한 공역이 재개되었고, 이곳에 30명의 승려를 두어 금살생령을 시행하는데 왕흥사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에 따라 죽은 왕자의 추복을 위한 백제 왕실의 원찰이었던 왕흥사는 규모와 기능이 크게 강화되어 호국적인 성격을 가진 국가적 규모로 변화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사원의 명칭이 왕권 강화의 의미를 담은 ‘王興’으로 명명되었는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법왕대 창건 기사가 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어 무왕대에는 법왕의 단기간의 재위로 인해 한동안 중단되었던 왕흥사의 공역을 준공하면서 왕흥사의 기능이 변화되었다. 왕흥사 전체 가람 뿐 아니라 주변의 조경사업을 장엄하고 화려하게 조성한 점, 무왕이 직접 배를 타고 건너가 이곳에서 행향의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는 점, 익산에 미륵사와 제석사가 잇달아 창건된 점, 종래 석가불 신앙에다가 미륵신앙을 적극 수용한 점 등에서 그 변화 양상을 찾아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무왕대의 왕흥사는 사리신앙, 정토신앙, 미 륵신앙, 그리고 법화신앙 등을 통섭하여 전제왕권을 구현하려는 왕권 강화의 이념적 도량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역적으로 왕도 지역을 넘어 지방에까지 확대시켜 불교이념을 통한 왕권의 위상 제고와 권위 확립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의자왕대에는 왕흥사의 위상이 무왕대에 비해 크게 약화된 면모를 보여준다. 이는 의자왕이 불교보다는 유교정치이념을 보다 숭상하는 정치 운영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의자왕은 유교사상에 대한 강조를 통해 왕권의 재확립에 정치 운영의 목표를 설정한 것이다. 이처럼 의자왕이 유교정치를 지향하게 된 것은 즉위초에 단행된 친위정변이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investigate historical changes of Wangheung-sa which had been built by King Widuk(威德王), in terms of its establishing intention, function and status, in relation with the kingdom of Baekje in the Sabi times. According to the case of Beopheung-sa in Japan, and results of archeological research, it can be indicated that Wangheung-sa was established before and after in 577 as its wooden pagoda was constructed. Wangheung-sa was founded by King Widuk’s wishes, and it was one of two royal family’s temples, the other of which was Neung-sa, for commemorating King Sung or the prince. King Widuk had intention of strengthening solidarity of His royal family and authority, by constructing the Wangheong-sa’s wooden pagoda. By holding the enshrining ceremony of Buddha’s relics, he attempted to strengthen royal authority, and reestablish the basis of royal authority by taking Buddhist ideology actively. King Beop(法王) reopened to construct Wangheung-sa which had not still been completed since its start during the reign of King Widuk. By His having 30 Buddhist monks stay in the temple, it could play a central role in enforcing the Ahimsa principle(禁殺生令). Therefore, the temple could be developed into a nationally-treatable temple. The temple was named‘ Wangheung(王興)’, meaning the strengthening of royal authority, which was commented on the articles of its foundation presented in Samguksagi and Samgukyusa Due to the King Beop’s short period of reign, constructing Wangheung-sa was not continued, but King Mu succeeded to the constructing project and completed the temple. From then on, the temple’s function had been changed. Those changes can be found in the following aspects: 1) Decorating up magnificent and luxurious gardens of the temple and around the temple as well; 2) King Mu(武王)’celebrating the splendid incense ceremony(行香儀式); 3) The successive establishment of Mireuk-sa(彌勒寺) and Jeseoksa(帝釋寺) at Iksan(益山); and 4) The active acceptance of the Maitreya-belief to the existed and conventional Sakyamuni-belief. Wangheung-sa, in the reign of King Mu, became as an ideological temple for strengthening royal authority by integrating Sarirabelief, Jeongto(pure land)-faith, Mireuk-bilief, and Lotus Sutra Faith. In addition, he attempted to enhance His power and authority using the Buddhist ideology, nationally and locally. In the reign of King Euija(義慈王), however, the influence of Wangheung-sa seemed to be weakened, that can be deeply related with King Euija’s political beliefs he pursued, which was the Confusianistic ideology. He aimed at emphasizing the Confusianistic ideology for reestablishing royal power and authority. It seems that the coup tetat which occurred at the beginning of His reign might have made Him seek the Confusianistic ide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