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close

종래 6세기 한·일관계사에 있어서의‘ 임나일본부’ 즉,‘ 임나왜재’의 문제는 고 대한·일관계사 논쟁의 중심 되는 주제로 설치 목적과 주체 세력의 성격을 둘러싸 고 많은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일본서기』의 관련 사료를‘ 해양’과‘ 언어’중간자적 존재의 설정이라는 관점에서 재검토해 보면,‘ 임나왜재’란 임나에 소속되 어 교역과 통역을 담당하던 해상세력 집단으로 532년 신라에 의해 임나가 멸망된 뒤 에는 멸망된 임나를 부흥하기 위해 활동한 임나인들의 기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일본서기』에는 흠명 3년(541)에서부터 14년(552) 사이의 사건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532년 임나멸망과 이후 전개된 부흥운동 사이에 는 9년의 시간적 차이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기상의 오류는『 상궁성덕법왕제설』과『 원흥사가람연기병류기자재 장』 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흠명천황 즉위년의 오류 즉, 531년(辛亥) 계체천황이 사망하자 이를 이어 흠명이 즉위하였는데, 흠명의 즉위년을 539년(乙未) 즉, 8년 뒤 로 미루어 기술한 데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와 연동된‘ 임나왜재’ 의 활동 시기는 임나멸망 다음 해인 533년부터 544년의 사건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는 것이다. 이러한 기년과 내용에 있어서의 오류는 6세기 한·일지역세계의 대내외 적으로 극심한 혼란 즉, 531년의 이와이의 전쟁, 계체의 사망과 흠명의 즉위, 532년 의 금관가야의 멸망과 이어지는‘ 임나왜재’에 의한 임나부흥 등의 사건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볼 때 종래의 6세기 한·일관계사는 재구 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従来、六世紀韓日関係史における‘任那日本府’すなわち、‘任那倭宰’の問題は古 代韓日関係史の論争における中心になす主題であった。その設置目的と主体勢力の 性格を取り囲んで多くの主張があった。ところで、『日本書紀』の関連史料を‘海 洋’と‘言語’そして中間的な存在という観点から再検討して見ると、‘任那倭宰’という のは任那に属していながら交易と通訳を担当した海上勢力集団で、532年新羅によ って滅亡された任那を復興するために活動した任那人たちの記録ということが分か る。さてこの場合、問題になるのは『日本書紀』にはその活動が欽明3年(541)から 14年(552)の間に見えているので、532年の任那滅亡とその以後展開された復興運 動の間には9年という時間的な差が発生するという点である。 このような時期上の間違いは『上宮聖徳法王帝説』と『元興寺伽藍縁起并流記 資財帳』の記録から分かるように欽明天皇の即位年の間違いつまり、531年(辛亥) 繼體天皇が死亡した後これを引き継いだ欽明の即位の事実が、8年おくれた539年 (乙未)としてのこととして記述されたことに起因すると言えよう。したがって、こ れと連動している‘任那倭宰’の活動時期は任那が滅亡した次の年である533年から 544年の事件として再構成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になる。このような紀 年と内容における間違いは六世紀韓·日地域世界が対内外的に極甚な混乱に落ちて いたからであろう。つまり、531年の磐井の戦争、繼體の死亡と欽明の即位、532 年の金官加耶の滅亡と、ひきつづき展開された‘任那倭宰’による任那復興の事件などに起因したとも言える。したがってこのような観点から見ると、従来の六世紀の 韓·日関係史は再構築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と思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