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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의 점복자들이 일반적으로 겪었을 역사와 사회문화적 배경을 간단히 살피면서, 점복자들이 집단거주지를 형성하면서, 경제적 및 사회문화적 이득을 성취하였던 점복촌의 존재를 역사 속에서 추정하기 위한 작업이다. 또한 이 작업은 현대사회에서 날로 증가하고 있는 점복촌의 본격적인 조사 및 점복에 관한 현대인의 심성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작업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해를 위해서 이 글에서는 집단거주하면서 점복을 행하였을 점복의 주체를 무격점복자와 맹인점복자로 나누어서 살폈다.맹인 점복촌의 존재는 명통사와 맹청의 존재를 통해서 이들 기관과 가까운 곳에서 집단 거주했을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지만, 호의적인 사회환경과 함께 복술업의 특성상 집단거주의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였다. 무격 점복자가 집단거주했던 것은 고려시대부터 지속되었으며, 점복촌을 형성할 수 있었던 이유와 그 위치를 다음과 같이 파악하였다. 도성 밖으로 쫓겨난 무격이 기회를 틈타서 도성으로 진입하기 쉬운 곳이었던 지금의 한강대교 용산 쪽 부근의 노들과 강 건너 지금의 동작구 본동의 산기슭 및 서울 남대문 밖 소머리고개(牛首峴) 등, 巫系 전승과 관련해서 홍제동 고개 너머인 구파발과 신당5동의 神堂인 왕십리 수풀당과 남대문 밖 우수현, 巫籍 작성과 무稅 납부를 통한 무격의 효과적 관리를 위해서 실시한 계획적 집단거주지로써는 동활인원이 있던 성북구 동소문동 4가와 서활인원이 있던 마포구 아현동(중구 신당동으로 이전) 일대, 巫團으로써 師巫廳이 있던 함경북도 경성과 神房廳이 있던 제주도 및 神廳이 있던 전라도의 나주장흥우수영진도완도 등지가 있으며, 그리고 세습무의 京畿道唱才都廳이 있던 경기도 수원과 노량진풍류방이 있던 노량진에서는 재인촌이나 광대촌에 무격들이 함께 집단 거주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 지역은 현재 흔적조차 찾기가 어려운 실정이다.무격 점복촌의 입지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역이나 시장, 또는 나루터나 특정한 종교적 의미가 깊은 곳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전국적으로 날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 현대사회의 점복촌의 입지와도 유사하다. 즉, 그 입지는 주로 도시 주변에 위치하면서도 시장과 같이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현대사회의 점복촌은 625 이후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급격한 사회변동 과정을 겪고 있는 현대인 모두는 점복촌의 주민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이러한 경향을 이해하는 것은 현대인의 심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앞으로의 연구는 기존의 점복촌 조사와 함께 점복문화에 관한 총체적인 현지조사에 집중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