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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 鄭律成의 활동과 지향-1945년 이전 중국에서의 활동을 중심으로- 정율성은 1914년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계의 학교를 다녔고,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예술인으로서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로서 삶을 살았던 매우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1933년 중국에 발을 들여놓은 후 의열단의 ‘朝鮮革命軍事政治學校’에서 혁명운동에 종사할 인재로서의 기본교육을 받고 남경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義烈團의 金元鳳과 ‘조선민족해방동맹’의 핵심인 金星淑·金山·朴建雄 등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계급혁명보다는 민족의 독립을 우선시하면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던 사람들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아울러 남경의 젊은 문예인들과 깊은 교분을 유지하면서 예술인으로서 자리를 잡았고, 맑시즘의 예술론을 습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중국의 문예계를 주도하고 있던 좌익문예계의 활발한 움직임, 그리고 일본의 노골적 침략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先安內後攘外’의 노선을 견지하고 있던 국민정부에 대한 실망 등이 겹쳐 그는 연안으로 향하였다. 즉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자마자 그는 중국공산당이 근거지로 삼고 있던 陝甘寧邊區의 연안으로 가서 혁명예술과 민족의 독립을 추구하고자 하는 자신의 희망을 펼쳐보이고자 하였다. 이러한 열망의 표현이 ‘延安訟’이나 ‘八路軍行進曲’ 등으로 나타났다 하겠다. 그는 철저히 毛澤東의 ‘文化軍隊’론을 추수하면서 예술인은 대중을 위해 복무할 것을 강조하였다. 혁명예술인으로 이름을 날리면서도 중국혁명 속에서 조선인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민족의 독립이라는 또 다른 희망을 실현하고자 太行山의 ‘朝鮮義勇軍’에서 활동하다 귀국하였다. 하지만 일제로부터 독립된 조국의 현실은 분단으로 왜곡되어 있었고 그를 포용해줄 수가 없었다.


郑律成的一生充满着传奇色彩。一九一四年出生于笃信基督教的家庭,就读了基督教学校。但来到中国之后,又度过了艺术家、革命家、独立运动家的人生。 1933年,初到中国南京的郑律成,先在义烈团举办的“朝鲜革命军事政治学校”,接受了从事革命活动所需的基本教育。在那里,他结识了主张民族革命优先于阶级革命、积极倡导左、右派之合作的义烈团的金元凤,“朝鲜民族解放同盟”的核心人物-金星淑、金山、朴健雄等人,并受到了他们的思想影响。与此同时,与南京文艺界年轻人士们保持着密切的往来,以此立足于文艺界。在此期间,还接触了马克思主义的文艺理论。 他对在日本帝国主义露骨的侵略下仍顽固坚持“攘外必先安内”路线的国民政府感到失望,并受到当时主导中国文艺界的左翼联盟的影响,投奔到中国共产党的中央根据地-延安,以求实现其追求革命艺术和民族独立的理想。这种渴望通过“延安颂”、“八路军进行曲”等的谱写表现出来了。他坚决追随毛泽东的‘文化军队’论,强调艺术应该为大众服务的理念。尽管作为革命艺术家扬名于中国,他最终还是未能克服其民族性,为实现民族独立的另一个理想,终结了在太行山的“朝鲜义勇军”活动回国了。但刚从日帝的铁蹄下独立的祖国又陷入了南北对峙的僵局,不能包容他的回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