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close

18세기 향촌 지식인 齋 黃胤錫은 매우 박학다식한 인물로 총 57책의 방대한 自筆日記 齋亂藁를 남겼다. 53년(1738~1791) 동안 지속적으로 自敍한 이 일기 속에는 저자가 應科와 赴直을 목적으로 上京한 총 22차례의 한양기행 기록이 들어 있다. 그 중 9차~12차는 황윤석이 38세로 莊陵參奉職에 蔭補 출사하여 莊陵과 고향 全羅道 興德縣 및 한양을 왕래했던 부임 기록이다. 本考는 그가 처음 관직에 나아가던 이 시점의 일기를 중심으로 벼슬살이에 대한 그의 생각과 고민들을 살펴보고자 한다.황윤석은 여느 선비들처럼 과거 급제를 통해 중앙 조정에 진출하기를 희망했는데, 전라도 출신이라는 지역적 한계와 변변치 못한 집안 배경 때문에 더더욱 擧業에 대한 열망이 강렬하였다. 하지만 24세 때부터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38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蔭補로 莊陵參奉에 初入仕하게 된다.그런데 황윤석에게는 이 一命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우선은 과거 급제를 통한 仕宦이 아니었기도 했고, 또 父親이 고매한 學德에도 불구하고 아직 遺賢으로 남아 있는데 자신이 먼저 南行으로 출사하는 것도 未便한 일이었다. 더구나 老論인 자신과 黨色이 다른 少論의 鄭景淳이 자신을 추천했다는 사실은 특히 더 마음에 걸림돌이 되었다. 황윤석은 본디 당색에 얽매이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소론의 추천을 받은 일로 스승 金元行에게 의심을 받고 걱정을 듣는 등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기 때문이다.이런 상황에서 齋에게는 그의 음보 진출이 吏判의 族弟인 정경순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名望에 의한 ‘公論’에서 비롯되었다는 명분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그래서 황윤석은 장릉참봉 시기의 일기에서 자신의 참봉직 제수가 당색을 떠나 公論에 의한 것이었음을 누누이 강조하곤 하였다. 덧붙여 父親의 一命을 知人들에게 부탁하고 다닐 때도 언제나 ‘公論’을 입에 외고 다녔다. 황윤석에게 公論은 참으로 매력적이고 소중한 의지처였던 것이다.강원도 영월의 端宗 묘소 장릉은 고향이나 한양에서 너무 멀었지만, 侍下의 황윤석은 어버이를 봉양할 경제적 여유를 얻기 위해 고을 수령을 목표로 결국 참봉직을 수락하고 영월로 부임하였다. 그는 참봉으로 근무하면서 장릉에 대한 寧越府의 침학에 맞서는 등 규범을 따르려는 원칙주의를 견지하였다. 소망하던 과거를 통한 벼슬살이는 아니었지만, 出六하여 수령직을 맡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황윤석은 장릉참봉으로서의 직임을 최대한 성실히 수행하였다.


Hwang Yoonseok's Public Servant-Consciousness viewedfrom his Conducting Chambong Position of Jangre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