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close

본고는 淸이 中國을 支配해 가는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던 筆帖式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소수의 이민족이 다수의 漢人 농경민족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중원에서 축적한 고도의 통치 시스템을 받아들이는 이외에 언어·문자의 장벽을 효과적으로 해결해야 하였다. 이 과정에서 역할을 담당한 하급 관료가 滿漢 두 언어와 문자에 밝았던 筆帖式이었다. 따라서 筆帖式의 등장은 滿洲文字의 창제를 전제로 한 것이었고 나아가 滿洲文字의 일정한 확산과 보급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1599년에 창제된 滿洲文字는 개정을 거쳐 널리 보급되는데 1644년 淸의 入關까지 변방에서 40여년의 세월 동안 활용되었다. 이 기간 만주족은 독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漢人 피지배층을 적절히 통치하기 위한 統治體制를 수립하여 중원의 제도를 모방·도입한 후 중원 지배에 들어섰던 것이다. 入關 후의 청조는 여전히 만주족 고유의 풍습과 언어를 유지하려고 하였고 여기서 발생한 것이 행정 문서의 滿漢 이중 작성이라는 문제였다. 특히 入關 초기에 중원 사정에 밝지 못하고 언어도 능하지 못했던 청 지배층과 고관들로서는 滿漢 문자에 능한 하급 문신 筆帖式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였다. 물론 전문적인 문서의 번역이나 諭旨, 勅書, 題本 등의 문서를 담당하는 上位 관원이 존재하였지만 방대한 업무량만큼이나 필첩식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였다. 중앙의 각 部院에서 지방 督撫에 이르기까지 筆帖式의 도움을 받아 문서의 作成, 抄寫, 管理 등의 업무를 처리하였다. 한편 八旗 집단을 기반으로 중국을 지배한 청조는 각 旗 출신의 文人을 出仕시키기 위한 방편으로도 筆帖式을 활용하였다. 이들이 중앙과 지방의 각 부문에서 문서 관련 업무를 담당하였기 때문에 八旗 귀족들로서는 이들을 통한 정보수집과 영향력 행사 등 활용할 가치도 많았다. 이처럼 광범위하게 설치·활용된 筆帖式은 그들이 맡은 업무의 성격상 승진도 빨랐으며 중앙 部院의 고위직에 오른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청의 중국 지배가 차츰 안정되고 滿洲族이 고유의 문화를 상실해가는 추세 속에서 자연스럽게 滿漢 竝用의 언어 문자 생활은 漢文 單用의 생활로 바뀌었고 이 과정에서 筆帖式은 입지를 상실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筆帖式의 쇠락은 八旗를 중심으로 한 滿洲族의 漢化로 표현되는 문화적 상황의 변화를 배경으로 하였다. 초보적인 사무원 수준의 번역, 문서 업무를 맡았던 筆帖式은 金·元·女直의 領史譯史 및 蒙古의 筆且齋의 예에서 보이듯 정복왕조가 높은 문화를 향유하던 농경지역을 통치하면서 운용했던 언어·문자의 소통울 맡았던 초급 관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유목문화와 농경문화를 언어·문자의 번역을 통해 그 교류를 최선단에서 담당한 문화교류의 첨병이었으며 청대에 특히 광범위하게 설치 운용하면서 그 역할도 매우 중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