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close

성、강시기 남도한 승려들은 자신들의 생계와 傳敎를 위하여 주동적으로 문벌사족들에게 접근하였고, 문벌사족과 교왕 중에 반야학이 점차 성행하였다. 게다가 北來 尼僧集團의 자극으로 강남에서의 니승교단도 점차 건립되었으며, 그들은 각종 경로를 통해 사족 내부의 여성들과 연계될 수 있었으며, 이것은 동진불교교단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樂賢堂佛畵頌’의 논쟁은 유씨집단과 왕씨집단의 투쟁을 반영하고 있다. 이 투쟁은 성제시기 유빙이 제출했던 ‘沙門應拜論’으로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성、강시기의 皇權과 불교는 모두 문벌사족의 지배 하에 있었다. 문벌집권자들 간에 불교를 이용한 논쟁은 이전에 비하여 더욱 격렬해졌다. 당대 대표적인 집권자였던 유량은 청담계에서 자신의 위망을 향상시키기 위해 불교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당시 비집권문벌사족들도 자기 가문의 이익을 위해 불교를 보호한다는 핑계 하에 유빙에 대해서 단결 투쟁했으며, 결국 승리를 취득하였다. 또한 성제이래 문벌사족의 ‘捨宅寺院’이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점차 토지를 중심으로 하는 사원경제가 출현하였다. 당시 사택사원 건립의 증가는 동진왕조의 稅制 개편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