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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1713-1792)은 이른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시(詩)서(書)화(畵)의 삼절(三絶)로서 문인화가(文人畵家)였을 뿐 아니라 미술평론가로 일찍이 ‘예원(藝苑)의 총수’라는 평까지 들었다. 그는 철저한 남종문인화가의 입장이었으며, 또한 독자적인 남종문인화의 경지를 이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에도 그의 예술 활동을 두고, 그 이전 시기의 남종문인화풍이 중국의 화법만을 받아들인 경우에 비한다면, 비로소 표암에 의해 우리나라에 보다 진전된 의미의 남종문인화가 실현정착되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는 평가까지 이어지고 있다.그런데, 이같이 조선 후기 미술사에서 ‘예원의 총수’라는 화명을 날리며 당대의 최고 명가(名家)를 이루었던 표암 강세황을 두고, 다산 정약용(1762-1836)이 강세황의 작품과 관련하여 단편적이나마 흥미로운 몇몇 기록들을 남기고 있다.이에 본 논고는 표암 강세황의 작품과 활동에 대한 다산의 몇몇 비판적 기록들이 의미하는 바, 당시의 시대 상황과 연계하여 고찰하여 보면서, 이같은 기록들의 객관적 실증 및 다산 생존시의 당대 문화계의 복원이라는 가치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여 보았다. 둘째로는 당시 연경행을 직접 체험하고 있는 북학파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인물들의 미술과 관련한 일부 행적 및 회화관(繪畵觀)에 관한 간략한 비교 검토를 통하여, 다산의 사실주의적 미술론이 이들과 어떠한 차이를 보이며 전개되고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그리고 셋째로는, 다산의 미술계(美術界) 인식이 그의 경세치용학(經世致用學)과 어떠한 연관 관계를 형성하며 조선 후기사회의 역사적 현실에 접근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그 결과, 다산의 표암에 대한 몇몇 기록들은 강세황 70세 이후, 즉 1782년 이후 다산이 회현방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바라본 대략 10년간에 해당되는 시기의 표암 회화의 경향과 일부 생활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었고, 다산은 공재 윤두서로부터 비롯된 치밀한 사실주의에 바탕하여 전개되고 있던 자생적 문인남종화계의 사실주의 회화관의 입장에서 표암의 예술 행적에 대해 일견 비판적인 의견을 개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반면, 표암 강세황은 당시 남종화(南宗畵)의 커다란 두 가지 경향, 즉 자생적 남종화론과 사의적 남종화론의 경향에 비추어 볼 때, 그의 회화적 출발이 일견 성호 이익과 같은 남인들과의 교류에서도 보여지 듯, 조선 중기 이래의 회화적 전통을 새롭게 혁신해가면서 그 토착적 기반을 다져가고 있던 자생적인 남종회화관(南宗繪畵觀)을 견지하고 있던 그가 최소한 70세 이후, 다시 말하면 그의 화력 후기 내지 말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들어서는 이미 그 이전 그 자신의 기록에서도 극히 개인적이고 심미적인 회화적 취향이 얼핏 드러나듯, 일견 매너리즘이라 할 수 있는 형식화된 회화의 경향성을 띄어가고 있음과 동시에, 회화론(繪畵論)상으로는 북학계열이 주창하고 있는 ‘사의화론(寫意畵論)’의 주장을 크게 넘어서지는 않는다고 이해해도 커다란 무리는 없을 것으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