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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도쿠가와 막부 말기의 朝鮮 및 對馬 문제에 대한 長州藩 유력 번사 가츠라 코고로(桂小五郞)의 대응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가츠라의 조선 문제와의 관련은 페리 내항 이후 서양열강의 외압에 따른 국가 위기를 강하게 느끼고 있었던 가츠라가 安政 5년(1858) 2월 吉田松陰으로부터 ‘竹島(울릉도)’ 개간론에 관한 서한을 받은 것을 계기로, 막부에 대한 장주번 단독 개간 추진목적의 주선활동을 전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비록 막부의 권고대로 절차상 필요했던 장주 번주의 공식 청원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허가는 받아 내지 못했으나, 울릉도의 조선 영유권을 부정하고 개간사업을 통해 궁극적으로 일본의 영토로 삼으려 했었다는 점은 주목된다.이어 가츠라의 대마 문제에 대한 관심은 文久 元년(1861) 2월에 일어난 러시아 군함의 대마점거사건에서 비롯되었다. 러시아의 무력 침략에 저항한 대마 민중의 기개에 감동한 가츠라는, 대마 문제가 일개 번 차원의 문제가 아닌 장주번을 포함한 일본의 국가 중대사임을 강조하며, 지원에 소극적이었던 번 정부로부터 소규모 지원을 얻어 내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이때 가츠라를 포함한 장주번에서는 대마번이 이웃이자 친척에 해당하는 사이임을 인지함과 동시에 서양열강의 군사력 앞에 무력하게 노출된 대마번의 재정적 궁핍·방비 부족의 현실을 알게 되었다.이후 장주번과 대마번의 관계는 대마번 가독상속과정, 재정원조요구운동 등을 통해 더욱 더 견고해져 간다. 文久 2년 9월, 尊攘노선에 기초한 동맹관계의 성립 후, 장주번은 대마번의 숙원사업 해결을 위해 다양한 경로를 통한 주선 노력을 전개한 결과, 12월 가독상속 관련 문제의 해결에 이어 이듬해 5월에는 재정지출 증가 등을 이유로 대마번에 대한 지원에 난색을 표명하고 있었던 막부로부터 재정 및 군사 지원약속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러한 장주번에 의한 적극적 주선활동의 중심에는 언제나 가츠라가 있었다. 특히 일련의 과정 속에서 형성된 가츠라와 (대마 번사)오시마와의 인간적인 친밀한 관계는 明治 초년 이후에도 계속되어 대마번 및 明治 신정부의 조선 정책 수립, 정한론 형성 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주제어] 가츠라 코고로, ‘죽도’ 개간론, 존양동맹, 대마번 숙원사업, 주선활동, 조언 169


本稿は、幕末期における朝鮮·對馬問題に対する桂小五郞の対応について論じたものである。桂小五郞は、安政5年2月、吉田松陰の書簡を受けてから初めて朝鮮問題(‘竹島’開拓論)に関心を持つようになった。吉田の死後、桂は、長州藩単独の ‘竹島(鬱陵島)’ 開拓に対する幕府の許可を得るための周旋活動を行ない、幕府側の口頭同意を得る段階までに至ったが、長州藩主の公式請願が行われなかったため、論議はこれ以上進まなかった。なお、桂は、文久元年2月に起こったロシア軍艦の対馬占拠事件の際に、対馬支援に消極的な反応を見せていた藩政府を説得して、若干の支援を導き出すと同時に、対馬藩が財政難·防備不足に陥っていることに気付かれた。 対馬士民の ‘大義’ に関心を有することになった桂は、対馬藩の懇請で藩主の継嗣問題の解決にも深く関わり、文久2年12月14日、幕府官吏の対馬派遣停止、25日対馬藩主の隠居、世子の藩主襲職許可を幕府から認められることに成功した。こうした対馬藩の宿願事業に対する桂の積極的な周旋活動の裏面には、‘隣藩·親戚’藩にあたる対馬藩の苦しい藩情に対する同情も働いた上、対馬藩への攘夷運動の拡散·尊攘同盟の締結という政治的願望もあったと見られる。桂は、対馬藩側の有力藩士の大島友之允とともに、各々藩上層部を相手に同盟工作を先導した結果、同じ年の9月30日、攘夷路線に基づく尊攘同盟を成立させた。以後長州藩は、対馬藩の財政窮乏の打開と防備不足の解決のための支援活動にますます力を入れていく。この過程で、桂は、長州藩を代表して朝廷·他藩の有力藩士を通して、幕府を説得していくという周旋活動を行なった。これにより、初めは財政支出の増加などを理由に対馬藩の支援に難色を示していた幕府をして、文久3年5月26日、食糧3万石の毎年3回の分割支給、軍艦·武器の事後貸与、という対馬支援策を決めさせるのに大きく貢献した。 以上から、ペリー来航以降、明らかになってきた外圧に従う国家的危機を深刻に受け取っていた桂が、吉田松蔭の ‘竹島’ 開拓論の幕府への周旋、そしてロシア軍艦の対馬占拠事件、長·対尊攘同盟の締結などを機に、対馬藩の宿願事業の解決のための周旋活動に深く努めた結果、一定以上の政治的成果を得たことが窺える。かかる一連の過程の中で培われた対朝優越意識と対馬藩びいき(特に大島との親密関係)は、明治初年の木戸の征韓論、対朝通交改革などに、そのまま反映されていくことにな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