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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동아시아를 문화적 관점에서 보면 한자문화권이라는 개념이 하나의 키워드가 된다. 漢字 · 儒教 · 佛教 · 律令制 이들 네 가지 요소는 고대 동아시아를 생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인데, 구조적으로 보면 이들은 중층적이다. 즉 언어는 문화와 사회의 기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개별적이고, 독자의 자립적인 역사를 그리는 것도 용인될 것이다. 언어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중국어도 고대로부터 변화를 겪어온 것은 말할 것도 없으나, 중국을 제외한 고대 동아시아에서도 한자한문이 정착해 가는 과정에서 각 지역의 자국어와의 사이에서 알력과 관용, 창조와 차용이 반복되어 그 한문도 변용되어 갔다. 당연히 중국어 실력이 높으면 올바른 중국어문(한문)을 쓸 수 있다. 그 한편에서 자국어 언어를 적는 문자체계로서 한자가 널리 쓰이고, 자국어 특유의 요소를 표기하려고 하여 점차 한문에서 괴리되어 가기도 했다. 본고에서는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 고대의 조선 · 일본의 문자자료를 조망하여 그 변용의 공통성과 특수성에 대하여 확인하고자 한다. 朝鮮三国과 日本에서는 기본적으로 같은 단계를 밟아서 漢文이 變容되어 갔다고 하는 共通點이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즉 固有語에 영향 받은 書記法이 朝鮮三国에서 조금씩 発達하고 그것이 日本에 傳来 定着되어 갔던 것을 여실히 말하고 있다. 『広開土王碑』 『中原高句麗碑』 『平壌城壁刻書』 『迎日冷水里新羅碑銘』 『戊戌塢作碑銘』 『南山新城碑』 『壬申誓記石』 등과 같은 資料를 통하여 보면 朝鮮三国에서의 漢文의 変容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 것으로 이해된다. ① 付属辞 要素의 慣用的 固定的 表現([例]中原高句麗碑 「中」, 「之」) ② 非漢文的인 構文 表現([例]迎日冷水里新羅碑銘 「所白了事」) ③ 고유어 語法이 반영된 漢文的 表現([例]迎日冷水里新羅碑銘 「教…教」) ④ 고유어 語順에 따른 表記([例]戊戌塢作碑銘) 그리고 일본의 『稲荷山古墳鉄剣銘』 『岡田山一号墳出土鉄剣名』 『菩薩半跏像銘』 『法隆寺金堂四天王像銘』 柿本人麻呂歌集(略体歌 680年 以前 成立) 등의 漢文의 變容을 朝鮮三国의 경우와 対照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① 付属辞 要素의 慣用的 固定的 表現([例]稲荷山古墳鉄剣銘 「中」) ② 非漢文的인 表現([例]江田船山古墳太刀銘「八十練」、岡田山一號墳出土鉄刀銘 「各田部」) ③ 고유어 語法이 反映된 漢文的 表現([例]観世音菩薩造像記 「奏」) ④ 고유어 語順을 따르는 表記([例]法隆寺金堂四天王像銘) 또 이것은 訓點의 書記法에도 通하는 것이다. 같은 膠着語라는 性質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朝鮮三国에서의 變容 過程을 日本語에서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일 것이다. 다만 그 後에 日本語는 独自의 書記法을 発達시킨다. 그것은 萬葉仮名에 의해서 音節表記하는 様式이다. 漢文의 한층 더한 變容은 日本에서 仮名文(萬葉仮名文)의 成立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萬葉仮名専用의 文章表記가 朝鮮半島에서는 발달하지 않고 日本에서 크게 발달한 것은 어떤 연유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으나 주된 것으로 다음의 두 가지를 들어둔다. (1) 日本語는 音節構造가 단순한 開音節 言語이기 때문에 無韻尾 漢字를 쓰면 비교적 용이하게 音韻을 표기할 수 있었던 것. (2) 日本은 中国과 地理的으로 보다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중국으로부터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이 보다 작았던 것. 7世紀 중반 이후에, 新羅와 日本이 각각 언어의 書記法에 적지 않은 差異가 생겼던 것은, 그러한 言語内的 要因과 言語外的 要因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白雉 4年(653年) 遣唐使의 인물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7世紀 중반 이후에는 渡来系 사람들 대신에, 土着系인 倭人이 학문 · 문화면에서 대두하게 된 것도 새로운 書記法과 表現法을 낳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古代東アジアを文化的な観点から捉える場合、漢字文化圏という概念は一つのキーワードとなる。これら四つの要素、漢字 · 儒教 · 仏教 · 律令制は古代東アジアを考える上で欠かすことのできないものであるが、ただ、構造的に見ると、これらは重層的に位置する。つまり、言語は文化や社会の基底にあるといってもよい。その意味で、個別的な、それ独自の自立的な歴史を描くことも許されるであろう。 そもそも言語はたゆみなく変化する。中国語も古代から変化を遂げてきたことは言うまでもないが、中国を除く古代東アジアにおいても漢字漢文が定着していく過程で、それぞれの地域の自国語との間で軋轢と寛容、創造と借用が繰り返され、その漢文も変容していく。当然のことながら、中国語の能力が高ければ正しい中国語文(漢文)が書ける。その一方で、自国語の言語を記す文字体系として漢字が盛んに用いられると、自国語特有の要素を表記しようとして次第に漢文から乖離していくこともあった。本稿ではそこに焦点をあてて、古代の朝鮮 · 日本における文字資料を俯瞰し、その変容の共通性と特殊性について確認してみたい。 朝鮮三国と日本では、基本的に同じような段階を踏んで漢文が変容していったという共通点が見られることは明らかである。すなわち、固有語に影響された書記法が朝鮮三国で少しずつ発達し、それが日本に伝来し定着していったことを如実に物語っている。 『広開土王碑』 『中原高句麗碑』 『平壌城壁刻書』 『迎日冷水里新羅碑銘』 『戊戌塢作碑銘』 『南山新城碑』 『壬申誓記石』等 以上のような資料を通してみると、朝鮮三国における漢文の変容は次のような過程を経ていったものと理解される。 ①付属辞要素の慣用的固定的表現([例]中原高句麗碑「中」「之」) ②非漢文的な構文表現([例]迎日冷水里新羅碑銘「所白了事」) ③固有語の語法が反映する漢文的表現([例]迎日冷水里新羅碑銘「教…教」) ④固有語の語順に従う表記([例]戊戌塢作碑銘) 『稲荷山古墳鉄剣銘』 『岡田山一号墳出土鉄剣名』 『菩薩半跏像銘』 『法隆寺金堂四天王像銘』柿本人麻呂歌集(略体歌 680年 以前 成立) このような漢文の変容を、朝鮮三国の場合と対照させると次のようになる。 ①付属辞要素の慣用的固定的表現([例]稲荷山古墳鉄剣銘「中」) ②非漢文的な表現([例]江田船山古墳太刀銘「八十練」、岡田山一号墳出土鉄刀銘「各田部」) ③固有語の語法が反映する漢文的表現([例]観世音菩薩造像記「奏」) ④固有語の語順に従う表記([例]法隆寺金堂四天王像銘) また、これは訓点の書記法にも通じるものである。同じ膠着語という性質を有しているため、朝鮮三国での変容の過程を日本語でも可能にさせたのであろう。ただ、その後において、日本語は独自の書記法を発達させる。それは万葉仮名によって音節表記する様式である。 万葉仮名専用の文章表記が朝鮮半島では発達せずに、日本で大いに発達したのはなぜであろうか。いろいろな理由が考えられるが、主たるものとして次の2点をあげておく。 (1)日本語は音節構造が単純な開音節言語であるため、無韻尾の漢字を用いれば、比較的容易に音韻を書き表すことができたこと。 (2)日本は中国と地理的により隔たっているため、中国からの政治的文化的影響力がより小さかったこと。 7世紀半ば以降、新羅と日本それぞれの言語の書記法には少なからぬ差異が生じていったのは、そのような言語内的要因と言語外的要因などによるものと見られる。また、白雉4年(653年)の遣唐使の顔触れからもわかるように、7世紀半ば以降、渡来系の人々に代わって、土着系の倭人が学問․文化の面で台頭してきたことも新たな書記法や表現法を生み出す契機となったであろ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