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close

宇文護는 北周 明帝를 독살한 뒤 武帝가 즉위한 560년 4월 이후에도 여전히 大총宰, 都督中外諸軍事, 五府總於天官을 겸임하여 軍政의 대권을 장악하고 覇府를 중심으로 宇文氏政權을 공고히 유지하였다. 武帝 宇文邕은 그의 권세를 인정하고 공순함을 드러내며 최대한 실각의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하였지만 실제 長安에 두어진 王都는 유명무실하였다. 그러나 覇府를 장악한 宇文護는 전쟁을 통해 覇府의 권한과 위세를 유지하기 위해 王琳사건에 개입하여 561년 1월까지 남조 진과 전쟁을 벌였지만 패배를 당한 채 철수하였다. 그러자 武帝는 561년에 御正 殷不害와 司會上士 杜고를 파견하여 교섭을 벌인 끝에 西魏 시절 江陵 점령 때 포로가 되었던 陳覇先의 동생 陳頊을 송환하여 562년에 진과 정식으로 우호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 覇府 주도의 전쟁이 좌절되고 王都가 외교적 교섭을 통해 국가간의 우호를 추진함으로써 수습하는 형세가 된 것이다. 宇文護는 이에 그치지 않고 563년부터 564년초까지 다시 突厥과 연합하여 北齊를 공격하였지만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또한 10월에는 20만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北齊를 공격하였지만 洛陽의 邙山에서 대패를 당하였다. 이번의 패전은 宇文護가 주도하는 覇府는 지휘상의 책임 때문에 그 위세가 반감되었다. 武帝는 다시 565년 突厥의 木杆可汗의 딸 阿史那皇后를 맞이하는 사신을 파견하여 567년 결국 혼인관계에 성공함으로서 突厥을 둘러싼 北齊와의 외교전에서 우위를 점하였고, 北邊의 군사적 안정을 확보하였다. 武帝는 宇文護가 주도하는 覇府의 연이은 군사적 실패를 외교적인 교섭의 성공을 통해 만회함으로써 만회함으로서 점차 王都의 권한을 강화시켜갔다. 게다가 그때까지 宇文護의 覇府를 지탱해주었던 창업공신들과 宇文泰의 親信集團 출신들이 연로하여 잇달아 사망하자 그 기반도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武帝는 王都와 覇府 사이에서 비교적 중립적 입장이거나 王都에 호의적인 漢族大姓 출신의 士人들을 발탁하여 주위에 두었고, 특히 宇文氏 종실을 요직에 배치하였다. 이는 宇文護로서도 찬성한 일이었다. 그런데 明帝 이후 天官의 御正과 春官의 內史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그들은 황제의 좌우에서 詔令을 기초하고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등 황제권의 행사를 주도하였는데, 특히 御正은 외교적인 교섭을 주도하는 역할도 맡았다. 宇文護는 王都의 권한강화에 따라 상대적으로 저하되어가는 覇府의 威望을 다시 살리기 위해 남조 陳 및 北齊와 다시 전쟁을 벌였다. 567년 宇文護는 진에서 발생한 華咬의 난을 기회로 삼아 湘州에 군대를 파견하여 진의 군대와 沌口에서 결전을 벌였지만 다시 패배를 당하고 소득없이 철군하였다. 무제는 다시 御正 杜고를 파견하여 양국간의 우호관계를 회복시켰다. 覇府의 정치적 위기 앞에서 宇文護는 다시 군사적 행동만이 覇府의 위망을 살릴 수 있다고 판단하여 569년부터 571년까지 北齊와 대전을 벌였다. 宜陽과 汾北 각지에서 벌인 전쟁은 汾北에서의 패배를 정점으로 하여 宇文護 覇府 몰락의 전주곡이 되었다. 572년 3월 18일 宇文護는 覇府가 두어진 同州에서 王都가 두어진 長安으로 왔다. 武帝는 宇文護가 叱奴太后를 알현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친동생 宇文直과 함께 궁중에서 宇文護를 살해하고, 이어서 宇文護의 자식들과 都督中外諸軍事府의 府僚들을 일망타진하였다. 그리고 전국에 大赦를 내리고 建德으로 改元하고 都督中外諸軍事府를 없앴다. 다시 陳 및 北齊와의 외교관계를 복원시켜 軍政의 大權을 覇府에서 王都로 옮긴 武帝는 각종 집권적 체제개혁을 實行함으로써 결국 王都를 중심으로 覇府를 흡수하여 一統시켰다. 따라서 武帝가 親政을 시작한 이후 皇帝權은 공고해졌고 더 이상 覇府와의 갈등관계도 없게 되었다.


自北周武帝武成二(560)年四月卽位之后, 宇文護繼續掌握軍事行政大權, 穩定宇文氏政權. 換言之, 宇文護爲天官大총宰, 都督中外諸軍事, 五府總於天官, 體制上確立軍政合一的覇府. 在這種情況下, 武帝不但容忍他的權勢, 而且以表現恭順, 無失權之慮. 武帝總攬政務的王都幾乎有名無實的. 然而, 宇文護强化覇府的威望, 557年出動軍師南下與陳朝會戰在武陵, 北周師戰敗不利撤回. 561年, 武帝竇고出使陳朝, 達成了以土地換人質陳頊回國的約定. 562年北周與江南陳朝之間正式確立瞭外交關係. 但宇文護與突厥聯合出兵攻打北齊, 實行南北挾擊的戰略, 自563年末至564年初, 兩師突破北齊長城, 進攻晉陽, 未得勝利, 只得撤回. 10月宇文護再幾乎動員瞭傾國之師, 進攻北齊的洛陽, 北齊師在邙山會戰大敗北周師, 這次大敗, 宇文護指揮不力, 負有重要責任. 武帝遣使突厥以木杆可汗女爲阿史那皇后, 安定了北邊的軍事威脅. 如以上所述, 覇府的軍事失利, 武帝利用王都逐漸强化權限的機會. 以宇文護左右的親信及創業功臣幾乎凋謝殆盡, 武帝漸被引用, 立場較中立的人士及漢族大姓出身的才學人士, 最后更大量引用宇文氏宗室人物於要職. 特別是自明帝以后在武帝時代御正和內史的地位不斷提高了. 他們在皇帝左右起草詔令,參與決策, 强化了皇權的行事, 特別是御正多活躍了在外交聘使方面. 宇文護爲了維持逐次落下的覇府的威望, 決定再次與陳朝和北齊戰爭. 557年, 宇文護利用在陳朝勃發華咬之亂, 出師南下湘州, 在沌口會戰陳師, 再次敗北不得已回軍. 武帝再次出使禦正竇고陳朝, 回復了兩國的友好關係. 覇府面臨的危機, 迫使他考慮採取更爲積極的軍事行動保護覇府的威望. 故自559年至571年在宜陽和汾北各地交戰北齊師, 敗北失地汾北. 這次戰爭的敗北幾乎宇文護和覇府的沒落. 572年3月18日, 宇文護自同州還朝廷, 武帝利用宇文護見叱奴太后的幾回, 與弟宇文直在宮中誅殺了宇文護. 誅殺宇文護之后, 馬上下令一網打盡宇文護諸子及他的中外府的部分屬僚. 而且下令大赦全國, 開元建德, 罷都督中外諸軍事府, 回復北周與陳朝及北齊的外交關係. 通過這一策略和行動, 武帝不但直接掌握中央政權與兵權, 實施各種集權的體制改革, 以中心王都一統了覇府. 所以然後在武帝親政時代更鞏固皇權的地位, 沒有王都和覇府的緊張關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