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close

왕안석은 1021년(眞宗 天禧 5년) 부친 王益의 근무지였던 江南西路 臨江軍에서 태어났다. 당시 왕익은 臨江軍判官으로 재직중이었다. 왕안석의 회고에 의하면 부친은 가족이나 주민들에게 매우 자애로운 사람이었다고 한다. 행정에도 매우 적극적으로 임했으며 농민을 가능한 한 보호하려는 자세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왕안석의 고향은 무주 임천현이었으나 그가 정작 고향에 돌아온 것은 조부 왕용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13살이었다. 이후 2년여 동안 고향에 거주하며 복상하지만, 그에게 고향 임천은 다소 낯설고 이질감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마음을 나눌 친구도 없었으며 아무런 전산도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외가가 위치한 금계는 고향 임천을 대신하여 마음의 안식처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그의 시문을 보면 고향 임천보다도 금계의 정경을 그리워하는 것이 훨씬 더 많다. 왕안석은 조부의 복상을 마친 후 부친을 따라 상경하였다. 이때 평생의 지우인 증공과 조우하여 교분을 맺는다. 부친이 강녕부통판으로 부임한 이후에는 강령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학업에 착수하기에 이른다. 그는 이 시기 일체의 세상사를 버려두고 오로지 학업에 몰두했다고 한다. 이러한 성실성에다가 천부적인 기억력과 지적 능력이 덧붙여져 그의 식견과 학문은 급속히 성장해 갔다. 부친 왕익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금릉에 안장하고 복상을 시작하였다. 이후 금릉은 그에게 제2의 고향이 되었다. 1041년 복상기간이 끝나자 왕안석은 상경하여 과거에 응시하였다. 그는 제4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다. 1042년 왕안석은 최초의 관직으로 첨서회남판관을 제수받았다. 첨서회남판관 시기 그는 지양주 한기를 보좌하였는데, 한기와의 관계는 몇 가지 오해로 말미암아 왜곡되어 버린다. 이후 약간의 공백을 거쳐 1047년(인종 경력 7년) 명주 은현의 지사로 임명된다. 지은현 시기는 왕안석의 생애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시기이다. 최초로 한 지방의 지방 장관직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훗날의 몇 개 신법 조항을 시험해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대대적으로 수리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춘궁기에 저리로 곡식을 대여해주었다가 추수 후 상환토록 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이러한 치적으로 인해 은현의 주민들은 왕안석을 크게 존경하며 따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