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close

이 글의 목적은 진보와 보수의 사상적 내용과 그 역사적 전개를 서술하는 데 있지 않다. 그런 종류의 작업은 정치사상사를 비롯한 정치학과 역사학의 여러 분야에서 이미 많은 성과를 낸 바 있다. 이 글은 그런 성과들을 전제로 ‘진보-보수-담론’ 그 자체의 기본적 존립 조건과 양상을 추상적으로 분석하고, 사회적으로 다양하게 분화되고 제도적으로 발전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적 권력 활동이 사회적 삶에 의미화되는 제도적 경로로 작용하는 진보와 보수 사이의 정치적 경합 관계를 ‘진보-보수-관계’라는 관점으로 포괄적으로 정식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그 요지는 진보의 원칙적 우월성과 실천적 선도성이 정치적 사태를 주도하는 가운데 보수주의가 그 반사적 재편 이데올로기로서 것이 현대 정치 일반의 정상적 게임 상황이며, 진보-보수-관계의 사상적 추동력은 진정한 진보성을 둘러싼 의미 경쟁이고, 이런 경쟁이 가능한 것은 문명화 수준에서 양측이 모두 민주화된 정치 및 문화 맥락 안에서 정치적 성숙을 기할 용의가 있거나 아니면 이 ‘담론적 실천’을 통해 정치 대중의 의사를 결집시킬 문화적 능력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진보-보수-관계’(PCR)론은 그 자체 진보와 보수가 각기 존립하면서 상호 경쟁하는 성립조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현실 정치에서 진보와 보수가 그 본연의 면모대로 발전하지 못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측정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한국 정치는 권력독점체제에 의해 ‘진보-보수-담론’ 그 자체의 성립이 불가능한 가운데 정권 수호와 정책 집행의 압박 속에서 한시적 유효성만 갖는 통치자의 업적이 정치적 의미를 갖지 못하는 항상적인 ‘정치적 빈곤’ 상태에 시달린 것으로 판명된다. 한국 정치사를 독점해 온 보수주의적 기풍이 보수주의적 이념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런 통치의 정치적 빈곤에서 기인하며, ‘진보-보수-관계’의 설정을 통해 구체적인 생활 과정과 연관된 의제화(議題化)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정치는 ‘권력-생존’ 차원에서 벗어나 ‘권력-의미’ 차원으로 풍부화되는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