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close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선차성이라는 후광 아래 전개된 세계와 타자에 대한 신체주관의 직접적 개방 속에서, 우리는 이 충만한 내재성 속에 도사리고 있는 존재론적-감성론적 유혹으로서 융합주의의 위험을 탐지해 낼 수도 있는데, 이는 바로 상호주관성의 상실 곧 세계의 살 속에 타자를 잠기게 하는 모험이라는 것이 레비나스의 불만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이러한 융합성은 특별히 상호주관성의 윤리적 차원을 망각하게 되는 반면, 그 자신의 윤리구도란 자아에 절대 우선적인 타자를 부각시키는 타율성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론이 비록 윤리에 내재한 이타주의를 희석시키듯 보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상호성이라는 가치는 적어도 메를로-퐁티에게는 너무나 당연히 지각차원의 보편적 가역성으로부터 기인하는 동시에 리쾨르의 새로운 자율과 레비나스의 집요한 타율을 동시에 구조화하는 새로운 실천이성의 모토가 된다.더 나아가 메를로-퐁티의 육화된 지향성의 연장선상에서 리쾨르가 제시한 레비나스 비판을 통해 우리는 저 신체 현상학자가 구축한 공동체의 골조가 복권되고 있음을 목도한다. 그것은, 자율성이야말로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적 타율성의 전제이자 조건이 된다는 리쾨르의 진술은 이미 메를로-퐁티의 지각적 상호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자신의 윤리학 설계를 존재의 전체성을 비판한다는 미명 아래, 타율성이라는 독단적 표현양식으로만 해석하므로 윤리적 상호주관성의 두 계기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는 정언명령에 대한 직관적 이해요, 다른 하나는 그 명법의 무조건성에 대한 심층적 동기부여인 바, 후자는 개인과 그의 삶에서 분리될 수 없는 보편주의적 의지의 표현이다. 결국 자율과 타율의 동시성은 메를로-퐁티의 존재론적 상호주관성을 정당화시키는데, 바로 여기서 리쾨르의 윤리학을 위한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적 독창성이 돋보이는 것이다. 이른바 윤리학을 위한 상호신체적 근거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구성적 특성인 <타자와 더불어 삶>이 함축하는 사회문화적 풍성함은 이제, 충분히, 레비나스의 초월적 윤리의 차원인 <타자를 위한 삶>의 몽학교사가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