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close

본 논문은 주희와 진량이 펼쳤던 논쟁에 대한 고찰을 주 내용으로 삼는다. 주희와 진량의 논쟁은 추구하는 목적의식이 다른 데서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차이는 역사와 인물에 대한 평가의 상이함을 낳고 있다. 주희와 진량이 보이는 관점의 대립은 세 가지의 내용으로 집약된다. 첫째는 한나라와 당나라의 역사에 대한 평가의 차이다. 이것은 넓게는 역사관의 상이함에서 비롯된 것이고, 좁게는 한 고조와 당 태종의 인물됨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희는 한 고조와 당 태종이 이루어낸 일들을 자신들의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는 순수하지 못한 동기의 결과로 본다. 반면 진량은 이들의 성과를 좋은 결과였을 뿐만 아니라 동기 또한 순수한 것으로 생각한다.둘째는 정치의 방법에 대한 입장의 차이다. 주희는 왕도의 실현이라는 이상적 원칙을 강조한다. 이와 다르게 진량은 현실에서의 성취를 위해서는 왕도와 패도를 겸용해도 무방하다고 보고 있다. 주희가 패도에 강한 부정의 입장을 갖는 것과는 달리, 진량은 패도 역시 왕도와 연관된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정치방법에 대한 주희와 진량의 입장은 패도의 의미를 규정하는 출발선에부터 다름을 드러내고 있다. 셋째의 내용은 의리와 이익에 대한 대립이다. 그런데 이것은 양자 택일적인 절대적 선택의 갈등은 아니다. 왜냐하면 주희가 이익의 문제는 전적으로 부정하고 의리만을 중시한 것도 아니고, 진량 역시 의리를 배제한 이익만을 긍정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 고조와 당 태종의 행위에 대해 진량은 그들이 성취한 이익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행위의 동기 역시 의리에 부합한 것이라고 보는 데 있다. 이와 달리 주희는 한 고조와 당 태종의 행위는 자신들을 위한 현실의 이익을 추구한 것이지, 의리와는 동떨어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주희와 진량이 펼친 논쟁은 이론전개의 논리적 한계를 지적하거나, 상대의 문제해결 방법의 결점을 비판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들의 논쟁은 역사적 상황에 대한 서로 다른 규정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희와 진량의 논박내용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권도의 수단적 유용성을 인정하려는 입장과 이것의 적극적 수용이 낳는 폐단을 지적하는 원칙주의의 대립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