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close

유진 오닐의 Marco Millions는 미국사회의 물질만능주의를 철학적인 동양문명과 대비시킨 풍자극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유럽인 최초로 중앙아시아 기행문을 남긴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의 일대기와 기행문을 바탕으로 쓰여진 오닐의 희곡은 지나치게 긴 작품 길이와 독특한 구성 때문에 자주 무대에 올려지거나 학술적으로 논의되는 뛰어난 작품은 아닌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희곡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역사적 텍스트에 대한 되받아 쓰기를 일찌감치 실행한 이 작품은 역사서의 위상에 대한 오닐의 정면 도전이자 그의 새롭고 진보적인 역사인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오닐 스스로의 용어를 빌자면 풍자미학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무대화 과정에서는 실험적인 오닐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정형화된 동양재현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 또한 안고 있다. 동방견문록으로 잘 알려진 마르코 폴로의 기행문은 최초의 서양과 동양의 만남이라는 문화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경험을 인정받고 싶었던 수감자 폴로의 회고에 의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기술된 기행문으로 역사텍스트로서 읽기엔 오류와 과장, 지나치게 주관적인 묘사가 특징이다. 특히 쿠블라이 칸과 그의 군대로 상징되는 동양남성은 언제든지 유럽의 기독교문명을 위협할만한 위험스런 이교도들로 묘사된 반면 동양여성은 매춘부와 일부다처제에 대한 묘사에 치우쳐있어 성적으로 대상화된 존재들로 그려진다. 황인종에 대한 공포인 옐로우 페릴(Yellow Peril)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 이 기행문의 주인공 마르코 폴로는 오닐의 작품에서 동양문명의 종교, 철학적 의미를 통찰하지 못하는 지극히 피상적이고 물질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역사의 진정한 비극은 동양문명의 심오한 정신세계를 간파하지 못한 물질주의자 폴로에 의해 서양 최초의 동양기행문이 기술되었다는 사실을 통탄한 오닐은 동양인을 대변하는 쿠블라이 칸의 시각에서 작품을 끌어가면서 실제 역사 속의 인물들과 그들의 행적을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한다. 에필로그의 마지막 장면이 암시하듯 이 작품은 물질주의에 대한 사회 비판 의식만큼이나 인식에 관한 극이기도 하다. 오닐의 동양문명 재현에서 동양여성을 대표하는 쿠카친은 성적으로 대상화된 동양여성의 전형은 벗어나 있으나 전형을 벗어났기 때문에 로맨스의 대상이 아닌 존재 결과적으로는 나비부인 유형의 또 다른 인물이다. 극중에서 폴로의 성적 대상은 동양의 매춘부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성의 대상이 아닌 쿠카친은 폴로가 유일하게 관심 있는 재물을 가져다 줄 쿠블라이 칸의 분신이자 수단으로 인식되는 비극적 존재이다. 1928년 첫 공연은 서양사회의 물질주의에 대한 작가의 풍자가 확실하게 전달되었음을 암시하지만 동양인들과 동양문명은 이국적인 스펙터클로 전락함으로써 작가의 풍자미학이 동양 재현의 면에서는 위세를 잃는 치명적인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