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close

이 논문은 영국의 대표적인 좌익 정치 극작가인 데이빗 헤어의 1978년 BBC TV 드라마인 ꡔ히틀러 패배시키기ꡕ(Licking Hitler)에 드러난 역사 다시 쓰기 작업을 살펴본다. 소품이라고 폄하되었던 이 작품은, 전 국가적 단결을 보여준 ‘위대한 전쟁’으로 각인되어온 제2차 세계대전과 이와 결부된 전후 영국 사회를 정치적 좌익의 시각으로 재해석해 낸 것이다. 이 작품은 좌익 정치 사가인 앵거스 콜더 (Angus Calder)가 그의 저서 ꡔ평민의 전쟁ꡕ(The People’s War)에서 주장하였던, 전쟁에 대한 새로운, 다소 아이러니컬한 시각―전 국가적 수행으로서의 전쟁이 결국 사회적 진보로 나아가지 않고 전후 영국의 보수적 사회의 강화에 기여하였다는 입장―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Heritage Drama 장르, 또는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보수적 이데올로기적 특성의 의식적인 전복을 통하여 효과적으로 부각된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시골의 한 비밀 장소에 위치한 영국의 반 히틀러 선전 첩보 기관의 활약상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Heritage Drama에서 주된 배경으로 등장하는 전원의 전통적인 대저택을 잡아내는 카메라에서부터 시작하여 역시 그것으로 끝난다. 이 대저택은 깊은 사회적, 정치적, 계급적 갈등을 지닌 채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의 메타포이며, 극의 말미에서 여전히 건재한 모습으로 포착되는 이 저택의 외관은 기존 사회 질서의 억압적 지속성의 시각적 등가물이다. Heritage Film 장르에서의 예술적이고 회화적인 카메라 움직임이 아이러니와 사회적 비판 시각에 저항하는 관객의 향수 어린 응시를 유도하면서 과거를 하나의 패스티쉬로 제공한다면, 헤어 극에서의 카메라는 자기 의식적이고 반사실적인 극적 스타일과 더불어 시청자들로 하여금 단합된 영국 사회 안에 내재하는 갈등과 모순의 요소에 주목하도록 요구한다. 정치적 아이러니와 역사적 역설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인간 관계, 특히 남녀의 사랑과 배신을 통해 드러난다. 아치 (Archie)가 애나 (Anna)를 강간하는 것은 그의 귀족 계급에 대한 증오의 산물이며, 전쟁이 가져다 준 노동 계급과의 이러한 ‘폭력적인 접촉’은 애나의 사회적 인식을 유도한다. 사회의 계급적 갈등의 존재에 눈을 뜨게 된 애나에게, 묵묵히 전쟁을 수행하는 아치의 태도는 비판적 대상이 된다. 반 나치전쟁을 계급 전쟁(class war)으로 인식하는 그의 뛰어난 통찰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가 견지하는 것은 기존의 정치적 질서에 대한 묵인에 다름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