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close

다음과 같다.하의도에 상륙한 신한공사 사원과 경관 등은 소작료를 강제 징수하기 위해 2개조로 나뉘어, 제1대는 오림리, 제2대는 대리로 향했다. 오림리에 도착한 제1대는 곧바로 가택 수색을 하고, 노인과 부녀자들에게까지 ‘소작료를 내지 않으면 총살시키겠다’고 위협하면서 농민들을 폭행했다. 농민 200여명이 경관의 행위에 항의하자, 경관대는 실탄을 장전해 농민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는데 그 과정에서 朴鍾彩가 중상을 입었다. 이에 분노한 농민은 자위수단으로 경관 4명과 신한공사 사원 2명을 구금하고 권총 1정과 장총 3정을 빼앗았다.한편 대리에 도착한 제2대는 구장 2명을 金世培의 집으로 불러 소작료 납부를 강요했다. 이에 구장들은 토지를 둘러싼 그간의 정황을 설명했으나 경관들은 이를 무시하고 농민들을 향해 위협 발포하면서 농민 6명을 체포해 오림리로 향했다. 오림리에서 경관대는 제1대의 무장해제 소식을 접하고, 농민 10여명을 검거해 신한공사 사원들과 함께 웅곡리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철수하려 했다. 농민들이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자, 경관대는 선상에서 무차별 사격을 가해 농민들을 해산시키려 했다. 경관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金田培가 즉사하고 金奉南은 중태에 빠졌다. 이에 격분한 농민 700여명은 8월 3일 웅곡리의 하의도 경찰 분서와 신한공사 출장소를 습격하고 창고를 불태웠다.이와 같은 농민의 저항에 대해 경관대는 ‘공산도배의 책동’으로 간주하면서 대대적인 검거와 탄압에 나섰다. 8월 4일 목포 경찰서 수사과장의 지휘하에 경관 50여명이 오림리에서 농민 200여명을, 나주 경찰서장의 지휘하에 광주 특경대 30여명이 서리에서 농민 40여명을 각각 체포했으며, 또 5일에는 무장경관 70여명이 대리에서 농민 200여명을, 또 6일에는 무장경관 40여명이 대리에서 청년 15, 6명을 체포했다. 더욱이 8일에는 미군부대(특파원 2명, 의료하사관 1명, 한국어 통역 및 사병 15명)가 ‘총력적인 전투태세’로 상륙하여 하의도는 무장경관과 미군의 경계 속에 대다수의 농민이 체포되고 폐허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攀 E. Grant Meade,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New York : Kings Crown Press, 1951, pp.230-233.攀攀이후 하의도 토지문제는 미군정이 종료되고 나서야 일정한 결론을 찾게 된다. ‘하의3도 토지투쟁위원회’가 전남도청과 국회에 진정운동을 벌여 토지가 농민에게 환원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1949년 7월 전남도청은 투쟁위원회의 진정을 받아들여 중앙정부 및 국회에 건의하였고, 8월에는 정부와 국회 산업분과위원회의 조사단이 하의도에 파견되었다. 이 결과 1950년 2월 국회에서는 하의도 토지의 무상환원이 가결되고, 5월에는 농림부에서 토지행정청 귀속농지 관리국에 명하여 경지환원 대상자 세부조사를 실시했다. 이후 하의도 토지문제는 한국전쟁의 발발로 관련서류가 소실되는 등 해결에 난항을 보이다가, 1956년 ‘나주 궁삼면, 무안 하의도 귀속농지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통과되어, 하의도의 농지는 정보당 200원의 가격으로 농민들에게 유상 환원된다. 이는 무상환원에서 유상환원으로 후퇴한 것이어서 농민들의 의지와는 반한 것이었으며, 이후에도 분쟁의 불씨를 남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